제목 | 로마서05)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審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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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25 | 조회수11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3. 12. 25. (월요일) 로마서05)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審判) (로마2,1-16) 1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 15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16 이러한 사실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로마서는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편지입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애를 태우며 간절한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느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왜 필요한데요? 라는 질문에, 나타나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1장 18절 이하였습니다. 인류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스스로의 자유와 욕심을 주장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되어 모든 벌을 이미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진노다. 하느님을 버린 형벌이다. 그게 뭔데? 하느님을 짐승으로 바꾸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 자기가 다스려야 할 더 저급한 모양을 만들어 무릎을 꿇는 것이 그것이 벌이며 스스로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광과 생명과 승리를 누릴 줄 모르고, 모두가 저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것, 즉 하느님이 인간의 선택을 허락하여 우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내버려 둔 것이 그것이 하느님의 진노며 벌이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하다. 하느님이 너희를 다시 이 비극과 처참한 현실에서 구원해 준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보는 2장에는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하면 이것을 다만 옳고 그른 어떤 도덕성과 의로움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얘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것이지 니가 선을 알면 선한 사람 아니다. 그 얘기, 저것이 악이라고 분별할 수 있고 단죄하면 네가 선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1장 18절 이하에 나온 인류의 현실, 죄인된 비참한 현실이 하느님이 우리를 내버려 둔 하느님의 진노라는 걸 기억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자신의 하느님의 창조물로서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보다 작은 것으로 자기를 기만할 수 있다. 그게 일종의 도덕성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2장입니다. ‘선(善)이 무엇인지 아는 것, 저 사람이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는 것, 그게 아니라 니가 선을 행할 수 있어야 된다.’ 이게 골자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악(惡)이 아니고 선을 선택하는 얘기가 아니라 바오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복음을 전하고 싶은 아주 속타는 내용은 ‘하느님과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인간에게 선(善)이 흘러들어올 수 없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회개하라’를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모두가 틀리는 이유가 우리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고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우리 모두를 움켜쥐어 회개하라고 촉구한다고 읽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얘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져보기로 하죠. 마태복음 18장입니다. (마태18,23-34)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용서를 할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기는 하고 베풀지 못하면 그는 용서를 받는다는 말을 모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도 나왔듯이 만 달란트는 굉장히 큰 돈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것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까 아마 이 백 데나리온은 한 1천만 원쯤 되는 빚이고, 만 달란트는 아마 일조쯤 되는 돈으로 비교가 됩니다. 이쯤 받았으므로 넉넉히 천만 원을 용서할 수 있는, 없는데서 용서할 수는 없는, 용서를 받지 않고는 용서를 할 수 없는, 용서를 먼저 주실 수 있는 무한한 하느님이 없고는 아무에게도 우리가 나누거나 가질 수 없는 그것에 대한 비유이다. 우리의 손을 잘 보십시오. 우리의 손은 비난하는 손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너는 잘못했다. 그 길은 틀렸다. 그렇게 하지 말고 그를 고칠 수 있게 그의 잘못을 덮을 수 있을 만큼 갈려면 나에게 그 죄와 불의를 덮을 더 큰 것이 있지 않고는 그걸 덮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생산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는 비난을 할 수 있고 판단은 하지만, 누구누구의 잘못을 우리가 덮을 수 있을 만큼은 우리 스스로 하나를 위한 선을 생산할 실력도 없다는 것이죠. 누가 잘못한 사람만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비난하고 틀린 줄 아는데 그걸 덮을 능력이 없다. 나 자신에게도 없다. 틀린 걸 알고 선한 걸 알지만 틀린 걸 덮을 것도 갖고 있지 않고 선을 생산할 수도 없다.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얼 위해서요? 하느님과 단절되어 있다. 무엇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뿐만 아니라 아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 하느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과 단절된 자는 스스로 가장 잘하면 공이거나 무가 되는 것이 최선이고 아니면 언제나 부패하거나 더럽거나 무슨 악행을 할 수 밖에 없더라.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진리의 한 자락을 잡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너다.’ 니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없어진다. 진리의 한 자락을 갖고 있죠. 구원을 논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류가 갈 수 있었던 최선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은 얼마나 무서운 결론일까요. 홀로는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생생할 수 없는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한은 쓸모 있고 이유 있어야 정체성과 만족감이 있어야 살 거 아닙니까? 희망이 있어야죠. 성경은 그것을 위하여 우선 이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하느님과 단절된 것이 모든 문제다. 하느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지 않으면 너희는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선을 생산할 수가 없다. 나눌 수가 없다. 너 자신이 이미 부패와 왜곡과 선의 부재의 희생자이다. 그 것 밖엔 기다릴 것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에 갈까요. 마태복음 25장에는 14절 이하의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마지막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변명과 항의가 세 번째 소개됩니다. 24절입니다. (마태25,24-27)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놀라운 항의(抗議)이고 놀라운 그 선고(宣告)입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분명한 사람이라. 용서가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이해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손해 보면 안 되는, “맡긴 것 내놔라. 그럴 것이므로 내가 땅에 감춰놨다가 내놨습니다. 당신은 원칙을 지키는 분이고 곧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여 감췄다, 내놨습니다.“ ”그래? 그럼 왜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붙게 하지 않았느냐?“ 판결이 이렇게 나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물들에게 이런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생육(生育)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充滿)하라. 창세기의 중요한 선언이죠. 인간을 만들자, 인간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하십니다. 생육(生育)하여 번성(繁盛)하고 땅에 충만(充滿)하라.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라. 그러니까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지위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면서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하느님의 청지기로서 하느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자로서 하느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누누이 강조되듯이 우리는 다만 그의 소유물이거나 그의 종이거나 그의 백성보다 크게 언제나 그 기업(基業)을 이을 상속자로 소개됩니다. 상속자는 아버지와 동격입니다. 동일한 통치자로서 부름을 받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무서움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만 존재했다가 없어지는 일회용이 아니다. 다만 어느 한 순간 한 지점을 점하고 있다.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느님의 통치, 창조의 영광을 나누는 복된 지위와 특권의 책임이 있다. ‘너 하나는 너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근데 너는 이거 같다. 파묻어 버렸다. 그게 니 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25장 40절에 가면, 이제 그 이 비유가 그 달란트 비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염소와 양 비유가 있습니다. 한쪽에는 주님께 칭찬받는 자들, 한쪽에는 주님께 심판을 받는 이들이 있는데, 잘 아니까 생략하고 선고만 보십시다. 40절,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게 뭐였냐 하면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것을 보고 도왔습니까? 그렇죠.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똑같습니다. 꾸중도 45절,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럽니다. 동일하게 꾸준히 그렇게 나오죠. 우리는 지금 무슨 문제에 직면해 있냐 하면, 로마서 2장에 의해서 우리가 얼마나 선을 생산할 능력이 없어서 우리 한 사람의 도덕성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크게 하느님의 일하심과 단절되어 무익하고 한없이 악한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지적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힘, 이상, 도덕성을 가지면 유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거듭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은 너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영광이 증명되어야 하는 존재고 의미여야 한다고 얘기함으로써 이 얘기를 모두 로마서 2장에서 지적하는 모든 꾸중들, 너희들이 뭘 안다고 하지만 결국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핑계에 불과하고 변명에 불과하고 그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 기억해라. 유대인은 율법으로 그 기준을 삼아 자기를 판단할 것이오,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이방인으로 태어난 자들은 양심에 비추어 보라.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 기준에 합격된 사람이 있느냐? 너희 스스로 말하라. 이렇게 모두를 몰고 들어갑니다. 로마서 2장 얘기는 모두를 하느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걸 확인시키는 장입니다. 이러니 회개해라가 아닙니다. 무시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방인은 율법이 없어서 못 지켰다고 얘기할 수 없다. 양심을 주었다. 유대인은 율법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걸로 됐지 않으니, 그 율법은 지켜야 되는 것이지 갖고 있는 것이 선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를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어떻게 했어야 되는데요?’ 우리 당연히 질문이 나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의 내용과 부요와 영광을 허락받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야 되는데, 그건 깨달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거는 그냥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걸 너희가 벗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 이 딸을 공격합니다. 골로새서 1장에 가면, (골로1,13-18)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성육신하신 인간의 이름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 작은 몸 뚱아리, 짧은 인생 자기가 살아야 했던 나자렛에서의 출생과 갈릴레아와 예루살렘이 전부인 요것 안에 하느님이 그의 충만을 넣을 수 있었답니다. 그게 우리가 그래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충만이 이 작은 몸뚱아리에, 이 짧은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리에, 이웃 작은 자들 앞에서 그렇게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인데, 어디 나가 있는가 봐라. 이거 시비밖에 붙일 게 없고 도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할 수가 있어야 행하지, 우리가 행하는 선은 기껏해야 ‘그러지 말자’가 다이지 그러지 말자의 방향에서의 내용은 없지 않습니까? 가난한 집에서, 이웃집에서 먹는 피자 냄새를 맡으면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패스트 푸드를 먹으면 몸에 나쁘단다. 콜레스테롤이 높아지고, 당뇨에 걸린다. 저런 거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배가 불러지냐 이겁니다. 이게 로마서가 하고 싶은 얘기입니다. ‘너희 회개해라가 아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몰아치는가? 회개해라도 아니고 거기서 돌이켜라가 아닌데 이 무섭게 아무도 도망갈 수 없는 너희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봐라.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이 너희를 버려두었다는 벌이 무엇인지를 봐라, 라는 무시무시한 밀어붙임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이런 것을 위해섭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마태13,10-15)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무시무시한 인용입니까?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느님의 존전(尊前)의 부름을 받아 서서 하느님의 한탄을 들으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다 주신 말씀입니다. “가라. 그러나 그들이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고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라 하옵니다. 그 인용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죠. 회개를 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고 감동을 시키러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하느님을 거부하여 갈 때까지 간 인류 역사와 인류의 고집에’ ‘하느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성실하신 의지를 지키고 계시다’ 이 둘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각자 그 앞에 항복하는 순간이 있는 거죠. 우리의 끝없는 고집을 인류 역사에서 얼마든지 보았듯이, 당연히 로마서 2장을 쓸 필요가 없는 다 거짓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고 다 무익해지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는 이 지적을 나열할 필요가 없죠. 말해도 모르고 회개하지 않을 자들임을 아십니다. 그들을 회개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걸 가로질러 인류가 거부한 그 버티고 있는 고집을 그의 힘으로 꺾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역사상의 실체로 하느님이 찾아와서 역사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쉬운 모두의 공감을 일으키는 가치로 이해되는 바람에 잘잘못을 기준으로 한 회개를 인도하므로 신앙은 마치 하나의 분별이고, 결심이고, 선택인 것 같이 되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다른 대안이 없는 자들을 하느님이 알고 계십니다. 죽어버렸으니까요. 거기에 이사야를 보내고 거기에 예수가 오는 겁니다. 그러니 바오로가 하는 얘기는, “봐라! 하느님이 죽음을 뒤집었다. 그의 신실하심을 지켰다.” 그 선언을, 그러니 아까 본 우리 골로새서 1장에서 본 바와 같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있게 한, 이 진정한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영광, 자랑, 그걸 살아라. 너희 가는 그 못난 거 하지만 그건 잘못됐으니까 뉘우쳐라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타난 이 영광을 봐라. 너 스스로가 알잖냐. 인간이 이래서 되겠느냐? 봐라. 그게 가고 싶은 거야? 최소한 날 봐라. 그러는 거죠. 바오로가 “날 봐라. 내가 세상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았으나 나 여기까지 힘껏 달려온 이유가 뭐냐? 봐라”라는 거죠. 갑자기 왜 저를 보세요?. 무슨 보상을 받았을까요? 위대한 보상을 받았죠. 제가 자주 인용하죠. 나는 훌륭해졌습니다. 훌륭해진 게 뭐냐고요? 제 한계를 기쁨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제 한계를 기쁨으로 모든 부족과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을 주신 예수 안에서 내가 충만을 함께 갖고 있다는 걸 압니다. 넉넉하게 나누고 어쩌고 하는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내 옆에 붙여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풍성하심이 흘러넘치는, 그래서 이 세상이 감당 못하는 것들을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예수께서 그렇게 걸어가신 성육신 같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럼 매일 할렐루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훌륭해졌다. 그러잖아요.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하느님을 외면해서 생긴 것들입니다. 허망하고, 의미가 없고, 쓸모가 없고, 헛되다는 것을 매번 합니다. 우리 세상에서 약속한 모든 것들이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 시간을 잊는 마약 같은 것이지,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되는 것을 세상은 제공하지 못합니다. 세상 자체도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기억하십시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혀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자기가 증거한 예수가 정말 메시아인지 아닌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메시아는 그것보다 더 권력과 크기를 가질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전혀 예상치 않은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제자 둘을 보내죠. “우리 선생님이, 스승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물어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얘기해라. 문둥병자가 낳으며,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우린 누구죠? 살아난 죽은 자입니다. 생명을 갖고, 그 생명의 내용을 갖고, 그 풍성함을 가지고 그 찬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위협과 거짓으로 막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입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하십시오. 믿는다고만 우기지 말고. 믿음이 가지는 위대함을 살아내야 되는데, 세상이 주는 것과 타협할 수 없는 하느님이냐 세상이냐로 나뉘는 영역이라는 걸 기억해야 됩니다. 그 모든 현실적 공격과 위협을 기꺼이 감수해내는 십자가로 이룬 승리(勝利)라는 걸 알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공허한 것이 됩니다. 현실성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을, 그 영광을 놓치지 말고 힘있게 우리 믿음을 지켜내고, 자랑하고, 승리하고, 감사하는 인생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이 로마서는 원로목사 박영선님의 글을 편집해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도 성경을 깊이 풀어주시는 분이 그립습니다. 교리내에서 말고 참 진리의 말씀을 ~~~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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