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20, 2 - 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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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3-12-26 | 조회수7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20,4) 어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복음사가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았던(요21,20) 제자입니다.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면서 어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성탄 대축일 다음 날에 지낼까, 하는 의문의 연장선상에서 요한의 축일이 왜 성탄 팔일 축제 기간 내에 있을까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과 관련된 복음이 많이 있는데 성탄 시기에 하필이면 부활 시기의 복음을 읽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그 까닭은 바로 사도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도이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요20,2)라고 표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집필한 사도가 바로 사도 요한이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거룩한 축제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믿었던(요20,8) 사랑의 사도 요한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는 복음이 오늘의 복음이기에 교회는 기꺼이 이 복음을 선택한 것이라 봅니다. 우리 또한 요한처럼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보고 깨닫도록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그 사랑의 신비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체험의 강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제 형제들 역시 같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조금씩 정도의 차이가 있고 기억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이렇듯이 모든 사도 가운데서 유독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이셨고 그로인해 다른 사도들과 달리 사랑에 일찍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랑에 뛰어나신 분이셨나 봅니다. 자신이 쓴 복음에서 요한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는 분명히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이 자신을 자신이 되게 했다는 자기 확신의 고백이며,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분들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요한 사도는 분명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감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만큼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이며,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이로써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음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다.” (요13,23~24) 는 기록을 통해서도 제자들 모두가 다 인정할 만큼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분이었습니다. 무엇이 사도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며 요한 또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예수님을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훨씬 더 사랑했었음에는 틀림없으리라 봅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랑했기에 사랑받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받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는 바로, 모든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 여정에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도망을 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 곁에는 몇몇 여인들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그 곁에 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어머니와 그 사랑하는 제자를 영적 모자의 관계로 맺어 주셨으며(요19,25~27), 또한 오늘 복음(20,2~8)에서도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달려갔는데 그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20,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서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복음이 굳이 이를 표현한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란 이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 그리워하고 더 빨리 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렇게 신속하게 달려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높은 산을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그는 사랑하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분이 계셨던 그곳으로 재빨리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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