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0)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된다. (로마4,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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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30 | 조회수13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3.12.30. (토요일)
로마서10)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된다.
(로마4,1-12) 1 우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2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3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4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5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9 이러한 행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하였습니다. 10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받기 전입니까?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 받기 전의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그는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 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할례받은 사람이란 그저 할례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보여 준 믿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4장은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이 어떻게 하느님의 의지와 지혜에 의한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방법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장 31절에 나온 바와 같이,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라는 마지막 말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그 말은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는’ 이라는 말이죠. 죄밖에 짓지 못하는데 다만 도덕성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불경한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에 대한 거부, 외면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하여 하느님은 ‘모두가 심판 아래 있다’ 라고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모두를 심판합니다. 그리고 3장 21절에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으로 국면이 대전환기를 가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처지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어 이제 율법 외에 한 의(義), 이로 말미암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속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세우심으로 허락된 구원입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요, 하느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자 등장하는 질문이 그럼 율법은 이제 쓸모없는 것인가에 원칙은 깨진 것인가? 이렇게 됐죠. 그렇지 않다. 그 은혜는 율법을 오히려 굳게 세운다 라고, 3장 마지막을 결론을 내고, 그 다음에 이제 4장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설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일하심(使役)은, 세상과 인간에게 준 창조의 대원칙 큰 질서를 무시한 행동인가? 그것과 충돌하는 것인가? 그 생각은 우리 모든 인류가 가지는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한 번씩 해보는 은혜와 율법과의 그 모순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율법이 제시한 것, 그리하여 우리를 심판으로 몰고 간 것은 율법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율법이 덩달아 욕을 먹고 있는 것뿐입니다. 은혜는 율법이 지적한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사실을 하느님이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완성시킨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불경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임한 것이 은혜였던 것 같이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은 파멸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에 하느님이 징계를 행함으로 진노와 심판을 보임으로 우리에게 잘못 가고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것 같이 그리고 그 지적을 해결할 수 없는 인류에게 하느님이 그 해결을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한 것 같이 율법과 은혜는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공의이며 그 공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방법이 은총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믿고 나면 율법의 가치를 더 잘 알게 되죠. 이 일이 어떻게 둘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갈 수 있느냐를 이제 ‘아브라함을 통하여 성경이 일찍 이 일을 하느님이 준비하셨다’ 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가서 찾아봅시다.
(창세12,1-3)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많이 혼돈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자주 아브라함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믿음을 드린 최초의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돼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마지막 로마서 1장 18절에서 로마서 3장 20절까지 다뤘던 내용은 인간은 희망이 없다 였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자가 없고 의로움을 행하는 자 없다.’ 그리고 모든 입을 막고 모두를 심판 아래 가둔 것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의 논증이었습니다. ‘아무도, 능력도 없고 요구하지도 않고, 마음에 그 경건한 생각을 가진 자가 없다’ 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부름이 그렇습니다. 12장 아닙니까? 1장과 2장이 창조를 말하고 있고 3장에서 타락합니다. 타락의 증거가, 현상이 현실에 드러납니다. 자식이 싸워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리고 자신의 탐욕을 자랑하고, 서로가 서서 서로에게 대해서 악한 일들을 행하여 두려워하고 너무나 혼란한 세상이 됩니다. 창세기 6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6,5-7) 5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6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7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 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 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하나도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과 부합되는 존재들이 없습니다. 인간 중에 말이죠. 그래서 노아 홍수심판이 일어 납니다. 노아를 통하여 모든 그 생물들을 살려놓기는 했지만 대심판을 지구 역사에 하느님께서 행하셨었죠. 그리고 노아 홍수가 끝난 다음에, 이 노아의 제사를 받으면서 ~
(창세8,20-22) 20 노아는 야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한 들짐승과 정한 새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 바쳤다. 21 야훼께서 그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 속으로 다짐하셨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전처럼 모든 짐승을 없애 버리지 않으리라. 22 땅에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 하느님이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심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걸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보존했더니, 바벨탑을 11장에 가서 쌓습니다. (창세11,1-9)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권력이 커지면 큰일 난답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보고 중에 이런 구절이 있죠. ‘부패하지 않는 권력은 없다. 개인도 부패하고, 그것이 합쳐서 힘이 커지면 더 크게 부패한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해야 되느냐? 혼자 있어도 부패한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그런 본성적인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 어떤 희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이 선언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납득하는 날이 빨리 와야 됩니다. ‘의(義)는 하나도 없다.’ 시간에 쫓겨 사는 것이 다행이다.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면 나도 망하고 여럿 망하게 할 것이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뭘 뜻합니까? 이 대책 없는, 희망이 없는 인류 현실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로마서 3장 21절이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앞과 뒤를 예수로 나누듯이, 아브라함을 부름으로써 그 앞과 뒤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뭐가 되죠?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떨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것이다’ 가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땅에서 쓸어버리고 내려가 흩어버릴 수밖에 없는 인류, 인류 현실에 하느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야말로 ‘그러나 이제는’에 대한 구약 정원, 옛날에 하느님이 인류에 대해서 가지셨던 은혜로우신 구원과 그 시작, 그 실제로 일하신 역사이죠. 창세기 15장에 와보세요. 아브라함에 관한 이 일들은 우리에게 이 시각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창세15,1-20)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2 그러자 아브람이 말씀드렸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커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3 나를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이렇게 여쭙자,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6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7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야훼다.' 8 아브람이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묻자 9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그 잡아 놓은 짐승들 위에 날아 오면, 아브람은 이를 쫓고 있었다. 12 해질 무렵, 아브람이 신비경에 빠져 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13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 15 그러나 너는 네 명대로 살다가 고이 세상을 떠나 안장 될 것이다 16 네 자손은 아모리족의 죄가 찰 만큼 찬 다음, 사 대만에야 돌아 오게 될 것이다.' 17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18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19 이 곳은 켄족, 크니즈족, 카드몬족, 헷족, 브리즈족, 르바족, 20 아모리족, 가나안족, 기르갓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에 별 같으리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물을 가져다 놓으라. 제물을 둘로 쪼개고 언약 당사자와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우리 중에 이 약속을 깨는 자는 이 제물이 쪼개진 것 같이 저주를 받아 옳다’ 라는 맹세를 합니다. 맹약을 하죠. 그걸 하느님만 지나가십니다. 아브라함 보고 지나가라 그러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을 하느님이 이렇게 부릅니다. 7절에 다시 보면,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야훼다.' 이 모든 주인이, 일의 시작이,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잡혀간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아브라함에게 어떤 근거를 마련해요. ‘그는 믿음의 조상 아니냐?’ 라고 말하고 싶다면, 믿음이 왜 등장했는가를 보아야 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의인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심판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이루어졌다. 믿음은 되지 않냐? 이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다 못을 쳐 박았는데도 자꾸 거기를 연결함으로써, 믿음이라는 말이 가지는 대조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린 할 수 없었다. 우린 끝났다. 대책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구원을 이루었다.” 그게 뭐냐? 믿음이다. 하느님이 한 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조를 보시오 아브라함에게서 근거를 찾으려고 그러지 마. 역사적 사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하느님이 세워 내가 인류를 축복하고 내 능력과 신실함과 은혜로 말미암아 내 백성으로 기어코 만들고 말겠다의 첫 번째 대상 아브라함,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해낸, 하느님의 축복의 실행 구현, 그 완성의 대표인 겁니다. 단어가 믿음이라는 말로 나오니까 우리는 그것이 상대를 신뢰하고 기대함으로써 가지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다시 돌아와 버렸죠. ‘그러나 이제는’으로 쪼개 놓은 여기 제물을, 둘이 연결할 수 없는 그 간격을 우린 자꾸 메꿉니다. 우리가 한 것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을 우리가 가지자.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을 안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결과입니다. 하느님이 이 일을 하셔서 이제 처음으로 생겨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순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조건으로 등장하지 않고 이렇게 얘기하면 더 확실하겠죠. 예수 믿으면 회개하죠. 뭐라고 회개합니까? 주께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언제 돌아가셨는데? 이천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여러분이 회개하기 전에 2천년 전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셨어요. 그리고 난 이제 내가 믿어서 죽지 않고 믿기 전에 죽으셨다니까 구원을 이루셨다고 시간성을 보라는 거야 시간을. 일어난 일이에요.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 앞에 하느님이 나타날 때는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난 이제야 너희하고 뭘 하러 온 하느님이 아니라 이미 시작할 너희의 운명을 위하여 내가 모든 것을 이미 준 그 하느님이니라. 이렇게 시간의 차이를 놓고 이미 일어난 과거 번복할 수 없는 과거, 나의 결정에 의해서 어떻게 되지 않는 과거로 하느님은 당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내 결심과 내 만족, 이만하면 구원받을 만하고 이만하면 구원받는 걸 내가 안심해도 되겠다 하는, 개인적인 확인의 중요성은 모든 사람이 구별된 것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렇게 하느님이 오셔서 하나하나 구원하시는 것으로 하느님이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우주의 운명과 축복에 관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역사를, 세상과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에게 그것을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 든 것과 젊은이들의 차이가 뭐죠? 젊었을 때는 자기가 다 압니다. 사춘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 말끝마다 뭐 늘, 그렇게 태어난게 부모에게 큰 죄인 인거 같은 얼굴을 하고 늘 외면하고 대관하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 왜 그러죠? 자기가 다니까. 자기가 다 어떻게 얽혀 있는지 모르니까. 내가 불편한데 세상에 뭐 이렇든 저렇든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가지든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죽겠는데. 내가 깜깜한데. 이 철 없을 때 가장 대표적인 그 특징이죠.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좋은 것을 해도, 친절하게 그렇다고 않죠. 다 나이가 들어보세요. 걱정할 게 많습니다. 나라 걱정을 해야 돼요. 그럼 매일 광화문에 모여요? 아니에요. 그냥 걱정을 하는 거예요. 답이 없는 거. 그게 철든 거죠. 날씨를 걱정해야 돼요. 비가 올 때 와야 되고, 추울 땐 추워야 되고, 바람이 불 땐 불어야 돼요. 개인이 얼마나 큰 속에 들어있는지를 알게 돼요. 여러 가지 걱정을 하죠. 염려하고 하느님이 어떻게 큰 틀을 바꿔 놓으셨는지를 모르면 예수가 오셨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요. 세상이라는 판이 바뀌었다고요. 아브라함부터 그 새로운 시작이 이미 됐어요. 그 구체적인 성취와 그 구체적인 실체를 예수 안에서 보이는 거죠. 구약은 그 실체의 약속을 갖고 있고 그 은혜 속에 있지만, 실체를 보지는 못해요. 동일한 은혜 속에 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 ‘하느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으로 판이 바뀐 세상을 살고 있다고요. 부활 세상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속에 있다구요. 죽으면 가는 천국이 아니고 천국을 이미 살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과 화목(和睦)한 자로 살고 있다고요. 우리가 회개해서 하느님이 그 아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포함한 인류를 2천년 전에 하느님과 화목해 하신 일에 개인적 적용이 오늘 나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죠. 그게 뭐가 다르냐? 이 판이 은혜의 판 속에 있는 거죠. 그 전에는 멸망의 판 속에 있었죠. 절망의 판 속에 있었죠. 우리가 세상이 예수를 모르고 우리를 모르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힘들지만 저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체념하고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할 수 있는 거 다 하는 자들이고, 우리도 힘들지만 예수를 믿어서 더 힘든 것이기 보다 동일한 판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힘든 것을 저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힘들다고 얘기하는 것은 저들은 ‘지랄을 떨어도 되고, 우리는 할 수 없다.’ 안 하는게 명예입니다. 거친 말과 막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는 것만큼 손해입니다. 우리가 명예를 지키는 것이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을 아끼고, 하고 싶은 대로 보복을 하지 않는게 우리가 가진 자랑이죠. 왜요? 그래도 되는 본질적인 희망이 있고 세상은 없습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죠.
(창세17,1-4) 1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 2 나는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을 세워 네 후손을 많이 불어 나게 하리라.'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4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아직 이사악을 낳기 전에, 많은 민족이 생기기 전에, 아브라함의 후손의 많은 민족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이름을 가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성도(聖徒)요, 신자(信者)요, 하느님의 자녀(子女)입니다. 이름만 가진, 거죽만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하느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먼저 주어집니다. 그 모든 일에 누가, 무엇이, 그 조건으로 등장합니까? ‘내가’ 입니다. 내가 너와,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내요. 아브라함에게 한 것과 똑같이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런 약속으로 신구약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가면 모세가 그의 백성을 구하도록 하느님 앞에 부름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이런 말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한 번 더 확인해 보십시다.
(출애3,11-15) 11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너는 나의 백성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리라.'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다. 조상의 하느님이 무슨 뜻이었다고요? 이미 약속하고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 지금 와서 그렇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합의해야 일 시작이 되는 일이 아닌, 하느님이 이미 아브라함을 불러 순전히 하느님 스스로가 이 목적과 이 내용을 지켜내기로 약속하여 시작된 인류의 새로운 역사,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그의 후손들, 그것이 오늘 로마서 4장에 나타난 바로 아브라함에 대한 해석입니다. 믿음의 조상, 하느님이 인간을 그들의 조건과 자격에 의하여 운명을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진실하심과 복 주심으로써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로 한 사람의 대표, 그렇게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 우리가 믿는 신앙 고백과 희망들이 얼마나 큰 약속 속에 이미 성취된 것인가를 기억하여 우리 삶에 이 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니라. 나는 내 아들을 너희에게 준 네 하느님 야훼니라” 라는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여 세상을 이기고 우라 자신의 못난 것을 이기는 신앙의 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 각각에게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 세상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고 그 복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영광된 책임이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니 변명하지 말고 어리석지 말고 우리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 책임 있는 인생을 살게 하소서.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위협과 시험 앞에서 하느님의 사람답게 하소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그 영광을 누리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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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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