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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 13)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구원 (로마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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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02 조회수16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4. 1. 2. (화요일)

 

로마서 13)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구원

 

(로마5,1-11)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로마서 51절에서 11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죄인이었을 때도 하느님이 너희 편을 들고 은혜를 베풀었다면, 은혜를 베풀어 자기와 화목(和睦)하게 하신 다음에야 얼마나 더 은혜(恩惠)를 베풀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이런 문제를 성경이 다루고 있는 이유는, 이 시간 순서가, 구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2,000년 전에 일어났고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고 그 이후에 인류들은 자기가 태어나는 시대에, 예수님 죽으신 후에, 지금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 깨닫고 믿기 시작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먼저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는 뒤에 태어났는데, 구원이 먼저 이루어졌고 우리가 나중에 알고 믿게 됐는데, 우리는 계속 우리가 얻은 구원이 취소될 것만 같고, 부족할 수 있고, 실패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또는 그때까지 신자로 못 살 것만 같아서 하느님 앞에 부끄럽고 하느님이 외면하실 것 같아서 매일매일 조마조마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타 다른 종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다른 종교들이 그들이 믿는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고 인간이 신을 찾아가서 설득하고 감동시켜 보상을 받아야 되는 종교인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소원이나 진심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이 문제를 계시가 인식보다 앞선다 그랬죠. 하느님이 인간보다 당연히 우선하십니다. 순서상 우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주인이시고 가치와 운명을 정하시는데 그분이 선하십니다. 그게 최고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지금 로마서에 등장하는 이 구원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은 믿음이라는 표현입니다. 로마서에서 쓰고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율법과 대조되는 행위와 대조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건을 만들고 우리가 근거를 만들어야 되는 것과 대조되는, 하느님이 조건을 만들고 하느님이 근거가 되는 방식, 그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의()입니다.

(로마5,2)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어야 은혜를 받는다. 라고 당연히 생각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얘기하지만, 은혜가 조건을 필요로 하면 은혜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죠?. 그것이 우리가 조건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일이라면 로마서 4장에서 이미 얘기한 것 같이, 그건 삯(代價)이지 그게 어떻게 은혜가 되겠냐 라고 이미 짚고 넘어온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바 일한 것이 없이 받는 일, 잘못에 용서를 받는 일, 그런 게 은혜라는 거죠. 잘못했는데도 받는 것, 용서, 은총, 은혜라는 단어들이죠.

그러니까 믿음으로써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이 은혜는,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의지다. 그래도 이게 우리한테 어렵습니다. 앞에 418절에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용했는가를 다시 한번 찾아 들어갑시다.

 

(로마4,18-21)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우리를 그저 성경이 원래 의도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하게끔 오해되는 구절이 많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일이,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어서 그 후손들이 이렇게 많아졌다 라는 보상이 되어 있고, 그가 바랄 수 없고 그가 자식을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하느님이 축복했다 라고 읽힙니다. 믿음이 복()과 은혜(恩惠)의 근거가 되는 순간, 그리스도교는 붕괴되는 겁니다.

여기 아브라함은 뭘까? 창세기 22장을 찾아가 봅시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말씀을, 이사악을 바치는 사건에서 다시 찾아보십시다.

(창세22,10-18)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고들 한다. 15 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16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네가 나를 이렇게 믿고 네 아들도 바쳤으니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을 하늘에 별 같게 하리라.’ 뭘로 확인을 해요? 이사악을 잡자. 이사악 자신도 이미 백세나 되어서 나서 자기가 난 게 아니다 라고 아브라함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사라가 낳죠. 하느님이 한 번 더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독자 모두를 그 이사악을 잡아라. 네가 낳는 자식들로 네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만든다. 너는 애를 낳을 수 없다. 백 살에 이사악을 준 이유는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백 살에도 줄 수 있다. 낳을 수 없을 때도 줄 수 있다고 준거다.

그러니까 너 잡아라. 넌 네가 애를 못 낳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될 거다. 이사악을 잡은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 네가 자식을 만들 수 없음을 확인한 자리에서만 내가 하느님으로써 일을 하는 줄 네가 알리라 인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자식이 없는데 네 자손이 하늘에 별 같으리라. 이사악 하나 났는데 그거 잡아라. 어떻게 믿었겠어요?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아브라함이 그걸 다 알았다가 아니에요. 무슨 대책이 있겠어요.

하느님이 오셔서 매번 그러는 거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뭐라 그러겠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랬겠어요?. 말이 됩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죠.

막막한데 하느님은 자꾸 와서 그런대요. 그 백 살에 애 하나 얻었더니 그것도 잡으래요. 그걸 하느님이 준 줄은 알아요. 잡으래니 대책이 없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말 아시겠어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제일 많이 오는 시험이 뭐냐 이거죠? 바랄 수 없는 신앙을 가지는가? 이 꼴로 무슨 복을 요구하겠소. 이 꼴에 무슨 하느님이 축복을 하겠어? 내가 이 꼴인데 무슨. 이게 우리 모두를 붙들어 잡아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뭐라고! 간신히 예수만 믿었지 뭐, 지옥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 내 까짓 게 뭐! 여기에 다 묶여 있죠.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건 이거예요. 죽은 자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이 생각했다. 그런 얘기. 살아있어야 생각을 할 거 아니야. 아이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공부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어야 생각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자식이 있어야 후손이 있고 말고 할 거 아니에요. 이미 나이 100살이 돼서 99살 때 하느님의 찾아와서 사라에게,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네가 아들을 낳을 거야라고 그러니까 사라가 웃어요. ‘아이고, 농담이 심합니다.’ 그건 물론 원문에서 빠져 있지만, 이 남은 다른 애들이나 잘 길러주십시오.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너 웃었다. 사라가 당황해서 안 웃었습니다. 너 웃었다. 내가 봤다. 너 니 아들 웃음이라고 지어라.” 그렇게 된 거예요.

바랄 수 없는 중에 웃음을 받아요. 그게 로마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언제 구원을 베풀었나 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 모를 때, 하느님과 어긋나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이 와서 죽는다니까. 시간이 그렇다니까 시간 순서가.

 

(로마5,7-8) 7 옳은 사람(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이 뭔데? 로마서 5장에서 사랑은 뭘까요? 사랑은 베푸는 자가 이유와 원인을 가지는 거야. 사랑을 받는 자가 이유와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유와 원인을 가지는 그게 사랑이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가 모를 때, 우리가 반대편으로 갔을 때, 그분이 우리와 화해하셨어요. 죄와 죽음에서 꺼내시고 그를 외면한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셨대.

 

(로마5,1)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이렇게? 그 앞에 있었던,

(로마4,23-25)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완료됐다고, 이 사건이 그러므로 지금은. 로마서 321절에 그 위대한 반전이 무엇이었어요? 모두의 입을 막고 모두를 심판 가운데 가둬, 아무도 하느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 너희는 다 죽었다. 거기에 뭐가 붙어? ‘그러나가 붙자 반전이지.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 하느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서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하느님의 의()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먼저 하셨다고. 하느님의 역사와 인류와 인생의 운명의 주인이라고. 그분이 일하시고 우리에게 그걸 베푸시는 거예요. 우리가 해야, 반응하는. 그렇게 소극적이지 않았어요. 우리 자꾸 놓쳐.

예수 이후에는 예수로 역사가 반분된다 그랬죠. 그 전과 그 이후로 하느님이 뭘 하셨느냐? 예수는 이미 오셨고, 이미 죽으셨다고. 역사의 사실이야. 뒤집을 수 없어. 번복시킬 수 없어요. 취소할 수 없어. 그러므로, 지금은 무슨, 뭘 할 때냐? 뭘 해야만 되는 책임이 아니고, 누리는 거야. 준거야. 당연히 질문이 나올 거예요.

그럼 마음대로 해도 돼요?. 그게 죄예요. 좋은 조건을 주면 좋은 조건에서 죄를 짓고 나쁜 조건을 주면 나쁜 조건을 탓하여 변명하는 것. 그게 죄야!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구원을 이미 베푸셨다는데 뭐가 불편해요. 그걸 왜? 그죠. 그리고 왜 늘 하느님이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준다 그래. 벌써 줬었는데.

(로마5,3-6)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환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연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사랑이 다 쏟아 부어졌잖아. 남김없이. 뭐가 겁이 나? 그러는 거죠. 무슨 환란이 겁이 나? , 고통이 겁이나? 그러는데, 물론 그게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는 이제 더 풀어야 될 얘기에요. 완료된 것, 결정된 운명을 알아야 돼요.

하느님이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를 알아야 돼요. 그래서 로마서 5장이 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했다. 그의 영광을 바랄 수 있다. 현재에 대한 안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비로소 생기는 거예요.

무엇을 근거로? 하느님이 예수를 이미 우리를 위하여 죽이시고 살리신 과거로, 완료된 사건으로, 확신을 가지며 평화를 가질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못 났을 수 있어. 그게 우리를 흔들지. 근거를 흔들어. 내가 못나게 굴면 이게 취소될 것 같애?

성경에 얼마든지 나와요. 출애굽 사건이 그래. 이스라엘 백성은 열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못나게 애굽으로 돌아가자. 먹을 게 없다. 애굽에 있을 때는 이런 거 저런 거 다 먹지 않았느냐? 이 광야에 먹을 게 없다. 돌아가자.’ 그래서 어떻게 돼 돌아가? 못 돌아가지. 하느님이 돌려보내지 않아요. 죽여버렸지.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 못 싸운다 가봤자 질 것이다. 밤새 울고 통곡하고 돌아가자. 그래, 그래서 어떻게 돼? 못 돌아가. 하느님이 돌려보내지 않아. 뺑뺑이를 돌죠. 40년간 그거 하지 말라는거예요.

밤낮 조마조마하고 자신의 실력만큼 하느님이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하느님이 더 하세요?. 당연히 더하지. 부모가 되면 다 아는 거 있어. 자식을 몇 년 동안 길러보고 솎아내지 않아. 그러는 부모 있어? 안 그래? 못난 자식은 있지만 버릴 수는 없어.

그건 상상 속에, 선택 속에 없어. 고통스럽지, 버리지 않아. 꿈도 꾸지 않아. 무슨 소리야? 대신 죽을 수 있어. 그게 부모지. 성경이 그 얘기를, 여러분은 이 사건을 잊지 말아야 돼요.

바오로가 훌륭해서 사도가 됐다?. 자꾸 바오로는 그렇지 않다는데, 우리가 우겨. 갈라디아서 1장을 가보면, 바오로의 서신서들은 전부 시작이 이렇게 돼 있어요. 비슷한 내용으로 돼 있어요.

(갈라1,1) 1 사도인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직을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설명하지? 자기의 헌신, 자기의 준비, 자기의 감동, 자기의 의지 같은 건 하나도 없어. 언제나 이거 수동태야. 붙잡힌다. 대고, 세워지고, 보냄을 받고야. 생각을 해봐서 사도 바오로같이 아무 조건, 반대 조건에서 하느님께 붙잡힌 사람이 그 유례가 없어.

다마스코로 살기가 등등해서 칼 뽑아 들고 가다가 예수님하고 그냥, 예수님이 그냥 박치기를 해버렸어. “이놈!”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 이제부터 내 종으로 살아라.” 종이 됐어. 얼마나 극적인 반전이야. 어디 어느 한 올이라도 바오로에게 무슨 조건이, 무슨 준비가 있어? 한개도 없어.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걸 왜 내가 제한해. 우리들이야 못 낳지. 우리 아들 못 낳지. 하느님은 안 낳으세요? 그 얘기를 하는거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자. 그거 아니야? 못 낳지.

또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야. 안 믿는 사람들은 모르나 아버지잖아. 뭐가 겁이 나겠어? 민망한들 어쩌겠어. 아버지! 그리고 다시 들어와. 어떤 아버지? 예수를 보낸 아버지잖아. 예수를 믿는게 얼마나 굉장한 건지 알겠어요? 우리의 종교심, 무슨 유용함, 무슨 유명세 같은 게 거기에 보상이 되거나 쓸모가 있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이 누구신데? ()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느님인데.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한 대. 당신의 영광이 뭔데? 십자가로 보인 증거,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에게 와서 죽을 수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예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내 마음이 쉼(안식)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하느님 선하신 하느님, 전능하시지만 극렬한 하느님, 아니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신 하느님,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역할, 자신의 존재 증언을 티모데전서 1장에 가실래요.

 

(1티모1,12-16) 12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13 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14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차고 넘치게 베푸셨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지는 믿음과 사랑을 나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 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16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나와요.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느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우리에게 준 영광이 우리의 자격과 조건과 전혀 무관한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있거든요. 이게 지금이야.

지금 누려야 하는 거예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지금 처한 형편에서, 이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아야 돼. 그걸 어디서 비춰? 이 암흑(暗黑)인 세상에서. 빛이 되는가? 그게 더 잘나고 또 굉장해서 빛이 되는 게 아니야. 이렇게 견디는 거야. 고린도후서 6, 내가 가르쳐 줄게요 이렇게. 이 하느님을 이렇게 증언하는 거야.

 

(2고린6,1-10)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2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 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우리가 하는 전도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힘입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세상에 거짓된 영광들을 정면으로 관통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우리보고 실패했다고 하고 틀렸다고 하고 고생한다고 얘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이것 없으면 안 되는 것, 손을 놓을 수 있게 됐죠.

세상에선 답이 없는 길을 우리는 마치 즐거운 일을 하는 것 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것, 열심히 노력했으나 보상을 받지 않는 것, 세상은 편파적이고 세상은 속이지만 하느님은 그러시지 않는 줄 알거든요. 그러니 우리의 영광과 명예가 어디에서 드러나겠습니까? 세상이 거짓말하는 데서 드러나죠.

이게 전부 다 이겨야 된다, 이겨야 된다,’ 질 일일 수도 있다고 가는 겁니다. ‘아니 왜 진 녀석들이 웃어?’ 니들은 몰라. 아니야. 그 길을 가야죠. 그리 큰소리 내서 이기려고 그러면 안돼. 신자의 명예가 뭐냐?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거죠.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뛰어들었듯이 답이 없는 세상 속을 우리는 늠름하게 가는 거죠. 예수를 믿으면 편해? 아니. 그 뭐 복을 줘? 아니. 근데 왜 믿어? 넌 몰라도 돼.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겠어요. 장님에게 색깔을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믿어야 아는 거지. 넌 참 이상하다? 그렇지? 넌 왜 그렇게 사냐? 너도 한 번 교회 와 볼래? 그러는 거죠. 뭘 설명을 하겠어? 뭘 누가 알아듣는다고.

은혜가 그를 찾아오기까지, 그의 눈이 열리기까지, 그의 영혼이 사랑하기까지 아무 말도 안 통하죠.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세상이 우리가 누군지, 아니 예수님이 죽은 게 뭔지 누가 알겠어요? 세상이 어떻게 알겠어? 기다리는 거죠. 세상은 지나가고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오실 테니까 늠름하게 살아있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요? 영광과 욕됨이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오해를 받으며, 속이는 자 같고 실제로는 진실로 참된 자인데. 무명한 자이죠, 사실은 유명한 자인데. 하느님이 기억하는 자녀인데 말이죠.

죽은 자 같죠. 아니 죽임을 당한대죠. 매일 저렇게 살면 망해의 길을 가죠. 지고, 양보하고, 보복하지 않고, 세상 식으로 싸우지 않고, 빼앗아서 채우지 않고. 그것이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우리의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겁을 내지 마십시오. 평화와, 이것이 영광으로 가는 길인 것을 아는 확신이, 우리의 삶을 붙들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위대해주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하신 일을 확인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마는 하느님이 그 약속 성실히 지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붙드셨습니다.

우리가 주님를 믿게 되었은즉 예수의 십자가가 이미 이루어졌고 그 일이 나에게 적용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인생을 주님의 이름으로 걸어갈 수 있는 명예도, 실력도 주옵소서. 우리를 보는 자들이 하느님을 아는 놀라운 기적들과 우리가 사는 길을 통하여 하느님이 영광 받는 사실을 기억하고 걸어가는 믿음에 위대한 용기도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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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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