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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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02 | 조회수484 | 추천수5 | 반대(0) |
2024년은 ‘용의 해’입니다. 옛날 중국에 장승요(張僧繇)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이 화가는 안락사(安樂寺)라는 절에 용 두 마리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 용 두 마리에는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묻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승요가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리자 잠시 후에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이 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화룡점정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비단 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을 그리는 그림에는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였는지 눈동자를 마지막에 그렸다고 합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화룡점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고, 공동체에 활력이 생기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용흥사라는 절에 진존숙이라는 명승이 있었습니다. 진존숙은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면 지푸라기로 짚신을 삼았습니다. 그는 짚신을 한 켤레씩 짝을 맞춰 산길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스님, 왜 짚신을 만들어 매달아두시는지요?” 스님이 답했습니다. “먼 길을 가다 보면 짚신이 낡아 발이 불편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지요.” 어느 날 용흥사에 낯선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진존숙은 그와 선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첫마디를 건네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진존숙은 속으로 ‘도가 깊은 스님이신가?’하고 다시 말을 건네니, 또다시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진존숙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용의 머리를 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뱀의 꼬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는 시작은 거창하지만 끝이 보잘것없고 초라함을 일컫습니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뜻을 세웠다면 시작하고, 시작했다면 마무리를 져야 합니다. 성공만이 마무리는 아닙니다. 일에 매듭을 짓는 것, 그게 바로 마무리입니다. 2024년에는 나의 말과 행동이 용두사미가 아닌 용두용미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서에 보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축복해 주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아버지’(아브람의 뜻) 대신에 ‘훌륭한 아버지’, ‘선택된 아버지’(아브라함의 뜻)로 불립니다. 그는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에 쓸모없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게 되자 선택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입니다. 시몬이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 받고, 위로하는 공동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즈카리야라고 이름을 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요한’으로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런 뜻에서 요한은 화룡점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나,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엘리야는 이미 와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 보다 더 큰이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요한은 분명 화룡점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 보다 더 크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기꺼이 용두사미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용두사미가 되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용두사미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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