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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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04 | 조회수549 | 추천수5 | 반대(0) |
10년 전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교님이 되셨지만 그때는 사목국장 신부님께서 제게 ‘그리스도론’강의를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 중에는 ‘성사론, 마리아론, 그리스도론, 교회사’가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신부님은 제게 그동안 하였던 ‘강의록’을 보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록을 참조해서 강의를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저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론 강의를 준비하였습니다. 어제는 안드레아가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필립보는 그리스도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타나엘은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예전에 강의했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론은 2천 년 전의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구세주라고 번역되는 서양말은 그리스도(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글자 그대로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그렇데 된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남북 왕조(이스라엘, 유다)로 갈려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약 50년 후에 유배가 끝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야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사제, 예언자은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 직무에 임명을 받았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자기 조상들이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성과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란 인물이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는 문헌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서 외에 예수님은 대해 언급한 세속 문헌이 소수 있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현대에 나온 이런저런 소설(‘다빈치 코드’, ‘최후의 유혹’)은 그야말로 소설일 뿐입니다. 신약성서는 4복음서와 서간문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사가들과 서간문의 저자들은 철저히 객관적인 역사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신학적 관점을 갖고서 각자의 사목적 상황에 맞추어 각자의 방식대로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외모나 성장 배경 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 운명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론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위해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존칭들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존칭들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서로 합성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존칭의 적용 기준은 존칭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역할과 신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 개념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과거의 다윗 왕조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고 다윗 왕조의 복구를 갈망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갈망과 함께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형성되었는데, 그 구원자는 왕이나 대사제 혹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왕, 대사제 그리고 예언자는 자신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래서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Messiah)’, 희랍어로는 ‘그리스토스(Christos)’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메시아 개념을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지혜서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고 고양된 의인의 모습을 메시아 개념과 합성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또 다른 지존칭호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에게 적용되었지만, 실상 이 칭호는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아빠’라는 신칭(神稱)에서 드러나듯이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활 이전에 드러났던 예수와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간택과 전권 위임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느님 아들 칭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칭호보다 나자렛 예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 편이며, 공동체와 세계 앞에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분임을 뚜렷이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과의 구분(복종, 종속),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동일성(그분과의 일치, 神性)을 포함합니다.” 내일은 교회의 역사에서 교부들과 공의회가 선포하고 고백했던 그리스도론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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