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7)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 (로마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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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05 | 조회수19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6. (토요일)
로마서17)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
(로마7,1-6)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니 말씀드리겠는데, 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2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자기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3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법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 전에 우리가 육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뜻밖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우리 모두에게 그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비유를 듭니다. 비유로서야 뭐 훌륭하거나 멋있는 비유는 아니지만, 아주 분명하죠.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자유롭게 됩니다. 자유롭게 된다는 게 무슨, 아무래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고 남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난다 하죠. 아내가 죽으면 남편도 아내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난다,’ 그건 뻔한 이야기입니다. 6장 전체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7장에 와서는 '죄가 죽었다'라고 얘기를 하는 셈입니다. 양쪽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조금 천천히 설명을 해서 분명히 하십시다. 지금 말하고 싶은 건 남편에게서 책임을 벗어나려면 남편이 죽는 게 하나 있고, 부인이 죽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죠? 왜 하필 이런 예를 들었는가는 내가 이제 천국 가면 바오로한테 물어볼 작정입니다. 이게 뭐, 이렇게 예를 멋대가리 없는 걸 들었느냐? 그러면, 이제 자기도 아마 창피할 겁니다. 근데 뜻은 알아먹었지? 그럴 겁니다. 뜻은 알아먹었죠. 우리가 로마서 6장에서 거듭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 ‘함께’를 강조하고, 죽었다 살았다를 예수와 연합해서,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다. 그 얘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로마6,6)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아내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렇죠. 아내가 죽으면 남편한테 아무 책임이 없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한테 아무 책임이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6장11절에,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면 이제 누구한테 책임이 있게 됐죠? 하느님께 책임이 있게 되고, 죄하고는 상관이 없는 자 됐다.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 모든 문제를 말하자면 죄가 무엇이냐에 대한 이해에서 이해를 해야 돼요. 죄가 뭐냐? 하느님 없음이 죄에요. 인간이 하느님 없음을 선택했단 말이에요.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자, 하느님의 통치와 보호와 그 복에서 벗어나자, 이탈하자, 죽음이 찾아오죠. 하느님만이 생명을 만드시고 보존하시고 채우시고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 생명에서의 공급이 끊기면 부패(腐敗)가 시작이 되죠. 그것을 우리가 도덕적인 현상에서 많이 보지만, 도덕성의 싸움이 아니라 이게 냉장고에 전기가 끊어져서 음식이 썩는 것입니다. 음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전기가, 전원이 끊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한 일이 뭐냐? 죄를 없이 하시는 거예요. 죄를 없이 하셨다는 게 무슨 뜻이냐? 우리 죄에 관한 설명이 이미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이 뭐냐 할 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 이렇게 출발했죠. 그게 왜 필요한데?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 아래에 있다는 걸 뭘 보고 알아? 하는 짓을 봐라.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얘기해요. 모든 더러움, 모든 거짓된 이것이 죄의 증상들 아니냐? 왜 그것이 생겼느냐? 하느님을 외면한 탓이다. 하느님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게 진단이었어요. 그럼 어떻게 회복을 하느냐? 하느님의 부재를 하느님이 걷어치우죠. 히브리서 2장에 갑니다.
(히브2,11-16)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13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고 또다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6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이 죽음을 없앤 거랍니다. 죽음(死亡)은 로마서 6장식으로 지금 얘기를 하자면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죄의 궁극적 운명, 도착하는 지점은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永生)입니다. 이쪽은, 하느님의 통치와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있는 곳에는 영생이고 영광과 승리고, 하느님의 통치가 없는 곳에서는 결국 부패와 왜곡과 소멸과 멸망밖에는 결과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하느님을 거부하여 죄를 불러들였습니다. 죄란 뭐라고요? 하느님 없음을 불러들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죠. 그게 죄입니다. 그러자 각종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도덕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당연히 현상으로 나오죠. 하느님이 없는 곳에는 의로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떻게 들어왔더라고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하느님이 이걸 어떻게 해결하기로 했다고요? 예수를 보냈어요. 어둠에 빛이 찾아옵니다.(요한1,2) “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5절) 부재의 현장에 예수께서 오심으로 예언대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그래야 부재를 없애죠. 부재의 자리에 하느님이 친히 오셨는데 어떻게 부재가 돼요? 나는 고개를 돌렸으나 돌린 곳에 하느님께서 찾아 들어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재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자리에 예수께서 따라 들어가, 우리 모두를 대신하고 함께 묻고 죽음의 자리, 부재가 만들어내는 그 운명, 부재의 권세, 부재의 결국에 따라 들어가 임재가, 임재를, 임재의 주인을, 부재가 부정할 수 없잖아요. 임재의 주인을 부재가 이길 수는 없잖아요. 죽음이 그를 잡아둘 수가 없는 겁니다. 부재의 결국이어야 되니까. 부재의 자리에 찾아와 부재로 죽음의 운명에 있는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죽음의 자리에 이르자 사망(死亡)이 손을 놓고 도망갈 수 밖에 없죠. 생각을 해보세요. 부재(不在)가 죄(罪)인데, 임재의 주인을 어떻게 부정한단 말이에요? 죽음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죄가 할 수 있는 죽음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죄가 만들 수 있는 우리를, 오늘 본문 같이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게 책임이 없듯이,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책임이 더 이상 없듯이, 죄에 대하여 우리가 없어지므로, 죽어버림으로 죄와의 관계가 끝나는데, 그 끝난 자리에 하느님의 임재로 인하여 죽음이 손을 놓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죠. 그게 우리라는 거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로마서가 다루는 것은 예수가 했다는 겁니다. 2,000년 전에 했다는 겁니다. 부재 속에 살던. 죄 아래 종노릇하지 말고,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좀 더 좋은 예를 성경에서 들어보죠.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에는 애굽과 애굽의 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노예된 히브리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히브리인을 구원하러 오십니다.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오십니다. 그리하여 파라오에게 내 백성을 놓으라. 파라오는 그럴 수 없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할 수 없이 손을 놓는데,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홍해 앞으로 끌고 갑니다. 마음을 바꾼 애굽 군사가 쫓아오고, 우리가 잘 아는대로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뒤에는 추격하는 이 세상의 권세 앞에 섭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갈라서 구출을 하시죠. 홍해를 갈라서 구출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애굽 쪽에서 보면 자기 종들이 홍해에 가서 다 빠져 죽은 겁니다. 더 이상 죽은 자들은 실제적인 책임을 질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권리를 잃게 됩니다. 왜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죽었으니까. 죽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죽음으로 우리 인생을 끝냈습니다. 애굽에 대하여 우리의 책임, 우리의 그의 권세 아래에서의 신음하던 모든 사정은 끝이 났습니다. 이쪽 돌아와서, 이 시나이 광야에서 보면, 건너편 광야에서 보면, 물에서 다시 백성들이 나오는 겁니다. 새로운 종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애굽에 있지 않고 약속의 땅에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동시에 하나도 애굽은 자기네들의 힘을 유지하고 가질 수 있었던 노예들, 노동력, 뭐 하여튼 그들이 힘을 쓸 수 있었던 힘의 근거들을 잃게 됩니다. 그들이 다 홍해 가서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애굽은 망하는 겁니다. 그들이 따라 들어와 홍해에서 죽은 것은 그런 상징과 의미를 가집니다. 죄가 더 이상 권세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부릴 백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죽습니다. 죄가 뭐였는데? 부재거든요. 하느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을 외면한 자들 앞에서만 힘을 쓸 수 있었던 권세가 하느님이 우리가 거부한 그 자리까지 쫓아 들어오심으로 부재를 다 걷어치우자, 죄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되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 우리 로마서 6장으로 돌아가면 계속적으로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6,12-13)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살아난 자 같이,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이런 것들은 다 명령법이 아니고 직설법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다. 이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알아들을까요. 자 지금은 미술 시간입니다. 그럼 어떻게 돼? 그림을 그리십시오. 그러는 거다. 자 이제부터 음악을 듣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요? 음악을 들으라구요. 자 스케이트를 탑시다. 스케이트를 타시라고요. 이렇게 하면 이걸 해주겠다가 아니라, 보상으로 받는 게 아니라, 국면이 변한 겁니다.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자 그동안 하느님 없음 속에서 있었던 부패, 왜곡, 헛된 더러움들이 아닌 명예로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은총이 뭐냐? 지위와 기회다 이겁니다. 이제부터 뭐 하는 모든 일을 말하자면 명예와 기회가 주어진 기쁨의 존재요, 인생이 된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문제가 도덕성이나 혹 종교성으로 인하여 늘 스스로를 자꾸 되돌아봐야 됩니다. 그러나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잘 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차원에, 어느 영역에, 어느 약속에 들어와 있는가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안 들으면 버린다. 그런 뜻입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그럴 때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 혼자 두지 않는다. 멋지게 돼라. 그런 어떤 보장과 큰 격려로 그 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경쟁사회에 사니까 우린 조금은 위협적으로 그랬죠. 넌 내 아래 아들이다. 나 니 꼴 못 본다. 이게 요새 많으니까. 넌 내 아들이다가 무섭죠. 없는 게 좋죠. 그러나 부모가 있고 없고는 다릅니다.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격려를 받고 꾸중을 먹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건 복입니다. 예수를 믿어 이제 너를 죄에게 주지 말고 하느님께 바치라는 건 큰 영광입니다. 헛된 고생할 거 없다. 네 인생을 살아라. 내가 이것으로 너를 훌륭하게 인도하마. 그래요, 기대하겠습니다. 오늘은 이거 하자. 내일은 저거 하자. 이렇게 하느님이 우리의 인생에 매일 찾아오십니다. 자 오늘은 뭘 그려볼까? 오늘은 무엇을 찾아가 볼까? 우리 주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후로 하느님이 우리 곁을 떠나는 적이 없습니다. 그의 부활과 함께 모든 성도(聖徒)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시어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확인했느냐 안 했느냐와 상관없이 로마서 8장 26절은 이렇게 돼있습니다.
(로마8,26)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은 무얼 의미하죠? 어디나 함께 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지위를 알아야 됩니다. 은총,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나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이어 오는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죠.
(로마6,12-14)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다.]
내가, 너희가 나를 외면한 자리까지 찾아가고 너희가 초래한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가 내가 너희 하느님이 된 하느님이다. 네가 각오하고 이해하고 결심하고 순종해서 얻은 결과들이 아니라, 예수로 내가 너희에게 이룬 이런 인생이며 운명이다. 이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7장도 계속되는 얘기를 뭘 합니까? 죄와 우리의 관계는 끝났다죠. 어떻게 끝났죠? 부재가 없어지죠. 부재, 하느님의 부재의 영역, 부재의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로마7,4)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멋지게 사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쉽고 만사 형통하다는 의미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이 로마서의 아주 중요한 절정에 이르는 결론이 하나 있죠.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몸을 산 제물로, 살았다는 건 죽었다 살았다가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제물로 드리라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통치와 그를 아는 자로서 살아내십시오. 죄가 아직 뿌리가 다 안 뽑힌 채 위협하고 유혹하는 환경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른 일이 중첩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만사형통(萬事亨通)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마치 자기네가 아직도 주인인 것 같이 그는 속이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어떻게 위대함으로 살 것인가?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너에게 준 영광이 뭔지 아는가?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이제, 구명정이 모자라서 남자들은 거의 타지 못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멋진 네 사람의 그 음악인들이 네 명의 현악사중주를 했죠.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을 때까지. 그게 그냥 멋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멋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것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것을 침해하거나 손상시킬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죠. 일부러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쇼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죽음의 그늘이 늘 습격을 해옵니다. 그 안에서 빛으로, 생명으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느님이 뭘 하시고 있는가? 했는가? 증명하는 삶을 살라는 거죠. 멋진 삶을 사는 거죠. 멋진 삶을,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야죠. 우리를 하느님께 드리고, 죄에게 드리지 않는 것, 그 싸움을 하는 거죠. 우리가 실패하거나 혹 넘어진다 하여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일어나야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그걸 안고 일어나야죠. 그게 멋진 거죠. 어떻게 동화같이 살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공주님과 왕자님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 그렇케는 안 되죠. 왜요? 우리 현실이 그것보다 깊은 도전을 하고 있으니까. 그 도전이 클수록 우리에게 준 영광도 큽니다. 도전이 커야 증거도 커지게 되는 겁니다. 에페소서 4장에 가면 바로 이 얘기를 이렇게 하죠.
(에페4,17-19)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느님 없을 때, 이것 밖에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때 가장 큰 거는 자폭이요 체념입니다. 세상의 위협과 도전의 가장 골자가 뭡니까? 자폭과 체념이죠. 여러분 스스로의 마음에 ‘인생이 별거야?’에서 그 마음이 들 때, ‘별거야!’ 그러셔야죠. 별거야. 아 거기에 위대함이 묻어나요. 그래서 뭘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 실력보다 더 커. 내가 생각하는 거보다 더 커. 이쯤 하려면. 여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건 허망하고 무지하고 감각이 없고 고집을 부리고 버려두는 거죠. 포기하니 방탕에 방임합니다. 그리고 더럽습니다. 그 다음을 얘기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
(에페4,20-24)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22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23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새삼스럽게 어쩌라가 아닙니다. 너희는 새 사람이다. 우리가 그 남자 아이를 기르면 주로 이 말하죠. ‘사내 자식이 그러면...’ 그게 꾸중을 하는 겁니까? 자존심을 격려하는 겁니까? 그죠? 자존심을 격려하는 거죠. "신자가..." 그렇게 얘기를 하면 꾸짖는 게 아니라, 자존심을 격려하는 겁니다. 우리의 복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나오나 보죠. 어떻게 명예롭게 살아야 되는가?
(에페4,25-29)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이게 도덕성을 가지라가 아닙니다. 늘 이 문제가 저한테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그게 옳은 것이다가 아니라 그게 명예로운 것입니다. 고함을 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뭡니까? 무서워서 그러는 겁니다. 그냥 지고 말까 봐. 저게 더 지랄을 떨까 봐 고함을 지르는 겁니다.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웃어! 괜찮아. 내가 있어. 이게 구원이요, 복음입니다. 넌 네 할 일 해. 멋지게 굴어. 어디 얼굴 한번 펴봐. 일부러 얼굴을 펴야 되는 현실을 살아. 가만히 있으면 찌그러져. 생각을 하는거야.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어. 예수 안에서 죽음이 뒤집어지는 걸 봤어. 뭐가 겁나? 위대하게 사는, 가슴을 펴고 믿음을 갖고 사는 거야. 그게 복음이야.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준 지위와 기회의 인생을 사세요. 각각의 그 눈물 나고 한숨 나는 인생을 사세요. 그래서 거기서 만드세요. 하느님이 우리 아래 만드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그 아들을 보내어 피 흘려 몸 찢겨 만들었다는 그 깊이와 그 감각을, 그 놀라움을, 그 구체성을, 각각에게 채우세요. 우리들 스스로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인생의 귀한 것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다른 사람이 격려해줄 필요 없는, 세상에다 그 확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기꺼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깊고 따뜻한 눈빛을 원하며...
우리는 종종 대책 없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왔다갔다하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앞에 그저 쩔쩔 매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아야 됩니다. 세상은 사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권세가 꺾였고 무너졌습니다. 우리를 실패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넘어짐이나 부끄러움은 잠시 당하는 것이고, 그것으로도 하느님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싸움에서 더 지나,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살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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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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