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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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06 | 조회수621 | 추천수3 | 반대(0) |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에 걸쳐서 공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는 것과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하신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요? 1) 하느님의 자비로운 다스림 하느님의 나라란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과 같은 한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통치(다스림)가 온전히 실현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통치, 다스림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거부감을 갖습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무력과 억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통치는 세상 권력가들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주 자비로운 통치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예전에는 자비롭지 않으셨다가 갑자기 자비롭게 되셨다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이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도외시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돌보신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 (1) ‘변두리 인생’도 보살피시는 하느님 예수님이 보살피신 사람들의 부류에는 우선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이 있습니다. 당시 통념에 의하면 병자는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이고, 마귀 들린 이는 악마에게 잡혀 있는 사람이며, 나환자란 죽음의 맏아들에게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멸시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서 도외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서,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치유하고 고쳐주심으로써 다시 하느님 백성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편견도 제거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두고서 본인의 죄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병이 반드시 죄의 결과는 아니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필연적으로 죄의 결과로 간주하는 편견을 타파하십니다(요한 9,1-3 참조) 또한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와 여인들은 온전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던 유다인들의 관습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를 어른들의 본보기로 내세우십니다(마르 10,13-16 참조). 또한 사람취급도 못 받던 여인들이 당신을 따르도록 하시고, 남편이 아내를 소박할 수 있던 것을 금지함으로써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던 여자들을 옹호하십니다(루카 16,18 참조). (2)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죄인을 가까이 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한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예수님은 죄인 그 자체로 간주되는 세리 직업을 가진 자케오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함께 하시고(루카 19,1-10 참조), 세리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2,13-17 참조). 또한 세간에 잘 알려진 죄녀가 당신의 발을 향유로 닦아주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루카 7,36-50 참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아파 사람들의 처벌에서 구해 주셨습니다(요한 7,53-8,11 참조).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불경스러운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하신 것이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거리낌 없이 상대함으로써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신앙에 근거해서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죄인들과 상종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느님 곁에 단호하게 머물려고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하느님의 적대자들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경건한 이들에게 죄인들과의 접촉은 단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허용될 뿐입니다. 더구나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경건한 이들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식사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식사 참여자들 모두에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경건한 이들의 통념에 거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이것은 율법에 충실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사공동체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인상 깊은 사건으로 비추어졌고, 반대로 그의 비판자들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행동을 비유들을 통해서 정당화하는데, 그 비유들은 하느님 스스로 죄인들에게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 가까이 모여왔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투덜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이어서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과 잃었던 양의 비유가 뒤따릅니다(루카 15,1-31). 다른 비유들에서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왕으로(마태 18,22-27), 빚을 탕감해주는 채권자로(루카 7,41-43),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심판자로(루카 18,9-14), 무한한 자비와 능가할 수 없이 큰 호의를 베푸는 포도원 주인으로(마태 20,1-15)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죄를 지어서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인간들을 찾아가시고, 죄인들에게 관대하게 용서를 베푸는 분으로 선포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 자신의 행동과 하느님의 행동이 상응한다는 주장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 안에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실현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3)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산상수훈에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폭력적인 보복의 법칙에서 떠나고, 악을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요구,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마태 5,38-47)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5)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근거해서 요구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5.48)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요청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한다면,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완전성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분노 속에 멸하지 않다는 점이 속한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들 서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 하느님은 분명 복수의 하느님은 아닐 것입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게 자비로운 분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따돌림 받는 이들은 물론 죄인들까지도 버리지 않고 당신 품에로 불러들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드러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날 수 있도록 가난한 이, 죄인들을 품어주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이 준비했던 황금, 유향, 몰약과 같은 것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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