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9) 죄(罪)란 하느님 없음이다. (로마7,14-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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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08 | 조회수14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 1. 8. (월요일) 로마서19) 죄(罪)란 하느님 없음이다. (로마7,14-23) 14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자연인들,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하느님 없는 인간들의 현실을 아주 통렬하게 지적하는 대목입니다. 우리 마음에 선과 악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지요. 늘 악이 이깁니다. 우리는 애통해 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뉘우치고, 기를 써서 의지를 동원하고 훈련하여 선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거기가 오해의 핵심이라는 거죠. 18절에 있듯이,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이게 늘 실패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데 그 이유가 의지력이 없거나 분별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시 14절에,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권세 아래 있습니다. 선을 행할 때도 악을 행한다는 겁니다. 옳을 때도 죄를 짓는다는 것이죠. 여기가 속는 뎁니다. 정직하면 옳은 것, 잘하면 옳은 것이 아니라, 그 잘하는 것으로도 결국은 죄밖에 못 짓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선을 성립시킬 능력이 없다. 그겁니다. 많이 속는 부분이죠. 그리스도교가 뭔지 모르면 바로 여기에 속습니다. 기도해도 안 됩니다. 이 말은 물론 극단적인 표현입니다만, 그래서 “난 기도했는데, 넌 왜 안 해?”가 되지, 기도해서 은총으로 온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성공한 자들이 은혜를 베푸는 적은 없습니다. 성공한 것을 보상을 요구합니다. 제일 많이 하는 못난 짓은 “넌 왜 안 해? 넌 왜 못해? 넌 그러니까 그 꼴이지!”를 성공하면 발언권을 가지는 게 아니라, 성공으로도 결국 죄밖에 질 수가 없습니다. 실패하면 억울하지요. 이번엔 억울해서 또 죄로 가지요.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하느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란 뭐냐? 하느님 없는 것의 부패와 왜곡의 무서움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썩고, 해가 나면 해가 나서 썩고, 바람이 불면 불어서 썩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비가 오면 자라고, 해가 나면 자라고, 바람이 불면 큽니다. 그 생명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습니다. 성경이 하려고 하는 모든 주장들은 이 하느님과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한 것이 무엇이냐? 로마서 6장 내내 한 것이 우리가 결정하여 자초한 하느님 외면, 그래서 하느님 없음의 자리에 내려놓는, 그래서 스스로 부패와 멸망을 자초한, 우리 하느님 부재를 만든 우리의 자리에 하느님이 쫓아 들어와서 부제를 없앴다는 거죠.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육신(聖肉身)입니다. 우리가 초래한 멸망의 자리에 쫓아 들어오셔서 죽음을 없애는 거죠. 하느님 없는 것의 궁극적 운명을 없애십니다. 그걸 구원이라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 그런 말은 아니라 그랬죠. 그것은 2,000년 전에 역사적으로 이미 이루신 일이지만 각각의 생애 속에서 적용되고 확인되고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를 때 하느님이 구원을 이루었으니 난 아무래도 좋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받은 복과 영광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구원을 얻은 정도가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영광의 길이고 명예의 자리라 그렇게 거듭 설명 했습니다. 오늘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정직(正直)이니 성실(誠實)이니 희생(犧牲)이니 하는 어떤 가치 있는 덕목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 스스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가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얘기하는 것입니다. 정직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필리피서 2장에 가면 그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필리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그의 순종을 본 받아라 그럽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 충성하셨나, 어떻게 있는 모든 것을 내놓고 희생하시는 게, 추상명사가 본질이 되면 안 됩니다. 희생, 충성, 순종, 각오가 아니라 성부 하느님의 기쁘신 뜻으로 자신을 채웠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자 하느님이 가지는 성부 하느님에 대한 항복이요 기쁨이었다. 그러는 겁니다. 그 하느님은 이렇게 하느님 되심을 자비와 성의와 우리를 복 주시는 사랑으로 표현하시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 분이다. 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 앞에 꿇게 합니다. 그 어떤 자랑도 그 어떤 가치도 그 어떤 영광도 그 어떤 것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견줄 것은 없습니다.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를 배반한 죄인들을 위하여 죽음의 자리에 찾아오는 것, 그것보다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막연한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것은 의지력이 되고 맙니다. 실천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이 됩니다. 거기는 자랑과 채점만 난무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은혜가 되질 않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오늘의 본문이 주장하듯이 우리 마음에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비극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 일을 행하신 것을 성경은 하느님이 누구신가, 스스로 당신을 자랑하시는 것이 십자가며 우리를 위하여 어디까지 올 수 있는가를 증명한 구체적인 사건이라고 얘기함으로써 그 앞에 얘기들~ (필리2,1-4) 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2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선한 일 할 때 겸손해라. 그런 얘기 아닙니다. 권면이나 교제나 위로가 또는 자비에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겐 없는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너 그 영광을 누려라. 그 크기를 너, 잊지 마라.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 있을 때, 좋은 소리이기 때문에, 맞는 소리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이 일하신다. 이건 우리에게서는 절대 흘러나올 수 없는 거다. 그거 기억해라. 하느님이 하신다. 하느님 그의 영광과 능력을 지금 구체화하고 계신다. 현실화하고 계신다. 놀래라. 들어라. 봐라.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일하신다고. 언제나 하시죠. 우리 모든 현실 속에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것 없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정말 궁금하지요. 세상에 답이 어디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는 그 고뇌를, 그 숙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가장 작게, 자기 하나의 마음의 평안,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요? 자기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야 뭔 마음에 안 들죠. 그걸 어떡하라고? 그 다른 사람이 자식이면, 부모면, 내 이웃이면, 우리 위층이나 우리 아래층이면, 우린 거기에서는 참거나 체념하거나 꺾거나 밖에 다른 방도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게 쭉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거야. 벌이지요. 그렇게 그냥 살고 죽을 거라면 무엇 때문에 살 필요가 있는가? 라고, 분명하게 속 깊은 생각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사는 게 뭐냐? 나의 가치가 뭐냐? 이 가슴 저미는 현실은 어떡하란 말이냐? 거기에 성경만이 답이 있는 겁니다. 저 예수 그리스도, 그냥 사랑, 헌신, 희생이 아닙니다. 성자 하느님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부 하느님의 보내고, 보냄을 받고, 안에서 드러나는 능력과 영광 그것을 성경이 얘기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도 다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려고 내가 왔노라.” 그런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덕목으로서의 사랑, 추상명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페소서에는 두 번의 기도가 있는데 첫 번째 기도가 이겁니다. (에페1,17-22) 17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18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 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21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알길 원한다. 너희를 지으시고 너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기를 원한다. 무얼 하셨는지 알길 원한다. 그게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알기를 원한다. 예전엔 이발소에 가면 그림이 하나 걸려 있곤 했습니다. 기억나세요? 이발소 그림이라고 유명한 대명사가 됐는데 이게 실력 없이 흉내낸 풍경화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무슨 폭포나, 개울에 나무숲이 울창한 것이나, 멀리 큰 산이 보이는 그림 같은 것을 이렇게 정말 쉽게 흉내 내는 그런 풍경화들이 있어서, 아, 예전에 밥 로스라는 사람이 토요일 EBS에서 ‘그림을 그립시다’를 방송했어요. 쉽게 그렸죠. 척척 하면 한 10분 만에 이렇게 풍경을 척척 그렸는데, 그래서 여러 사람이 따라 했습니다. 따라 하니까 정말 그 산과 숲의 모습이 척척 나오고 그 호수에 비치는 그림자를 이렇게, 색칠을 한 다음에 이렇게 쓱 손으로 한번 옆으로 이렇게 문지르면 그림자가 나오고 너무 따라하기 좋았는데... 이 말로 누가 초를 쳤죠. 이발소 그림. 왜 그랬을까요? 그게 죄입니다.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을까요? 그렇게 밖엔 우리가 할 수 없어요. 그때 그 그림을 보면서 그 무한한 동경심이 있었는데 서양이 가져온 그림이었고.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연만 이렇게 그린, 말하자면 그런 걸 감상하고 그런 걸 그릴 수 있는 어떤 여유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자연을 감상하는 자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자기네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증명하려고 그린 게 아니라 그걸 감상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깊이. 거기 숨어 있는 거죠. 언제 그림을 그릴 틈이 있어요? 산을 보면 옛날에는 먹을 게 달렸나 봤고, 그 다음에는 잘라다 장작을 하자 봤지. 언제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었겠어요? 결국 보니까, 그걸 볼 실력이 있어야 되는 거죠. 하느님을 모르면 삶에서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어요. 살아있는 게 그냥 다만 죄고, 다만 벌입니다. 일찍 죽는 게 옳은 결단입니다. 이유가 있어야죠? 가치와 무슨 기대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가치와 기대가 성경 이외의 것에서는 나오질 않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우리 자신에게 준 영적 갈증에서 얼마든지 묻어납니다. 세상에 무엇으로도 이 갈증을 채울 방법은 없습니다. 보복을 해서는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최고의 영화가 ‘벤허’죠. 멧살라를 죽였는데 영화가 끝나지 않아서, 고등학생 때는 이상하게 생각했다고요. 그리고 철이 들어서야 “그분이 이런 말을 했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 말이 내 가슴에서 칼을 내려놓게 했어.” 거기까지 가야죠. 멧살라를 죽여서는 아무런 보상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교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한문을 배워라 말아라, 배워라 말아라, 배워라 말아라 하다가 이제 공부가 끝났어요. 그래서 한문을 잘 몰라요. 우리는 문교부 장관 때문이라고 그랬는데, 어느 날 이규태 씨가 이런 글을 냈죠. ‘한문을 모르는 건 너다. 문교부 장관이 잘못한 거지만 모르는 건 너다.’ 그런 글을 썼어요. 할 말이 없어요. 문교부 장관을 욕하려면 한문(漢文)으로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을 쓸 줄 알아야 된다. 예수를 믿지 않고 인생에서 아무런 어떤 원망이나 어떤 이유를 대도 답은 없어요. 하느님을 알기까지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큰 영광이고 큰 자랑인지 알아야 돼요. 모르면 기도해야 돼요. 하느님 알게 하셨는데, 그 영광을, 저를 향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약속들을, 알고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야죠. 에페소서 3장에 가면 두번째 기도가 나와요. (에페3,14-19) 14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15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16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서두에 우리가 이렇게 얘기했죠. ‘죄란 하느님 없음이다.’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존재가 부패와 왜곡으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이 죄입니다. 아무것도 그걸 살릴 방법이 없어요. 그 죄가 하나의 큰 세력이고 운명이었다면 예수 안에서 이제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어요. 예수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묶으십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손 안에서 우리를 끊을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 큰 하느님의 능력과 성실하심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매일매일 기르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영광을 우리에게 함께 나누십니다. ‘그것 알아라’는 거죠. 우리가 가지면 전부가 아니고, 이기면 전부가 아니라, 가지고 이긴 것에 이 하느님의 영광이 묻어 나오느냐? 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됩니다. 우리들 억울함 속에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가 묻어나올 수 있느냐?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건 따지고 보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형통한 것과 고단한 것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대부분의 발언권은 역설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승자가 겸손해야 되고, 패자가 담담해야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역설 속에 훨씬 본질적 메시지가 더 크게 묻어나온다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얼마든지 보는 것 아닙니까? 겸손을 패자가 하는 걸 겸손이라곤 안 믿을 겁니다. 승자가 해야죠. 패자가 넋두리를 안해야죠. 어디서부터만 온다구요? 하느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런 실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하느님 없이 부릴 때는 가장된 잘난 척이죠. 잘났을 뿐더러 겸손까지 하는 거죠. 햄버거 위에 친 케첩에 불과합니다. 거기다 들깨 하나 더 박아놨을까요?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랑에는 만족이 있어야 됩니다. 진정한 비명 속에는 그렇게 질러 나눌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비명은 쓸데가 없습니다. 이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무한한 높이와 넓이와 깊이라고 표현된 무한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이 일하시는 거기야말로 신적 의지로 말미암는 능력, 그것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죄가 우리를 붙잡아 옳은 것을 가지고도, 선한 것을 가지고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베푸신 구원은, 우리의 하느님이 돼서,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으로 죄가 그리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승리하게 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겁내지 말라는 거지요. (에페3,20-21) 20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를 믿는다는게 무엇인지 알아야 돼요. 우리의 삶이 어느 한 자리, 어느 한 경우도 이 영광과 명예를 가질 수 없는 그런 경우나 자리는 없다는 걸 아는 겁니다. 잘 지고, 잘 이기고, 잘 살아서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이 시대 앞에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가 되는 인생이 되시오.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 내 형편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그것이 복인 줄 항복하게 됩니다. 남 부러워할 거 없고 시기할 거 없고 화낼 것 없이 내 인생을 살아야죠.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주셨으니 그대로 살아야죠. 그 명예와 그 자랑과 그 승리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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