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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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15 | 조회수373 | 추천수5 | 반대(0) |
‘천동설’과 ‘지동설’이 있습니다. 인류는 550년 전까지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출(Sunrise)와 일몰(Sunset)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입니다. 이는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천동설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별의 ‘연주 시차’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계절 변화인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발사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지구 중심이라는 사고의 폭을 우주로 향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보다, 1500년 전에 이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습니다.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60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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