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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3) ‘그러므로’ (로마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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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2 조회수172 추천수0 반대(0) 신고

바울,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처음 본 예수님 알아보았을까?

 

2024. 1. 22. (월요일)

로마서33) 그러므로

 

(로마12,1-3)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로마서 121절에 이르면, 이제까지 우리가 함께 은혜 받은 대로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설명된 하느님이 인류에 대해서 가지시는 목적, 의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신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우리가 그걸, 모두를 싸매서 한 단어로 부르는 구원을 설명합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 11장까지 이야기를 하면, 이제 12장부터는 국면이 바뀌어, 그러니 이런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다.”

이렇게 12장이 새로운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엽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앞에 있었던 구원의 얘기가 뒤에 있는 것을 책임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었던 것이 뒤에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책임이냐 기회냐 하는 이해의 차이는 매우 다른 것으로, 구원은 완료된 것이고 구원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구원을 받은 자가 사는 삶의 기회와 영광으로 가질 것이냐? 못나게 굴 것이냐? 이렇게 우리를 묻는 것이지, 구원은 받았지만 너 잘못 살면...”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누가 책임있게 살겠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떠오를 텐데, 이미 법에서는 강제력이 수단이 되어도 도덕만 해도 자발성이 없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하물며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은 본인의 마음에 그 신앙이 자신을 녹이고 항복시키고 위대함을 알아 스스로 그 길을 들어갈 실력이 없으면, 그것은 강제력으로는 도무지 실천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2장에서 이르는 그러므로라는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크게, 구원에 대한 설명에서 어떻게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잠시 되짚어볼 필요를 느낍니다. 로마서 1장에 가면, 로마서를 쓰게 된 이유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로마1,8-11) 8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9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을 찾아 갈 기회를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10 그 하느님은 내가 그분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성심껏 섬기고 있는 바로 그분이십니다. 11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 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려고 한답니다. 구원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약간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이들은 새삼스럽게 복음을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걸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무언가를 더 견고하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교회도 이게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우리교회 전체 수준에서 아직 거기까지 익숙해지거나 이해하거나 살아내는 일에 바로 이 로마서가 필요한 그런 시점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바오로는 길게 구원이 무엇인가를 321절부터 로마서 11장 마지막까지 썼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복음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 있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다.’

그 이야기가 118절부터 320절까지 이야기하죠. 다르게 설명할 거 없이 우리 스스로 인생을 살면서 용서하고 들으시오. 사람들은 다 나쁜 놈들입니다.’ 뭐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나쁜 놈이고 인생은 어렵습니다. 세상은 거짓되고 우리는 사실 사면초가입니다. 아무도 남을 도울 수가 없고 스스로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아닌 척하고 있는 겁니다. 벌벌 떨어봤자 손해고 화를 내봤자 날 도울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다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게 118절에서 320절까지 이야기입니다. 망하는 것 밖에 남지 않은 것이 역사고 인생입니다. 321절에 복음의 위대한 시작이 나오죠.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 모두가 모여 길이 없다. 세상은 그렇더라. 망하는 수밖에 없다. 누구한테 이 원통함을 호소할 때도 없다. 내가 말하는 원통함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내 잘못인데. 누구보고 어떻게 하라고 할 것인가? 스스로도 못한 것인데. 그게 어떤 친구 하나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그러나, 그러면 반전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끝날 멸망과 비극과 도망갈 수 없는 운명 앞에 서 있음을 확인하고 모두가 확인하고 이젠 죽었구나. 남은 건 처벌밖에 없구나!”에서, 그러나로 돌아서게 만든 것,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이게 복음이죠.

그러니까 이 앞에 것에서 "맞습니다. 인생은 해결이 안됩니다. 역사와 인류의 운명은 비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사나 싶었는데, 내가 살아보니까 그 길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은 나 스스로를 고칠 힘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에 오지 않으면 예수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국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잘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망하게 되었다. 내가 죄인입니다.” 해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나가 무엇 앞에 서야 된다고요? 그 현실, 그 진실 앞에 서야 됩니다. 그 진실과 그 현실, 인생이 뭐냐? 인간이 뭐냐? 라는 진실과 현실을 아직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러나는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거기는 그러므로가 들어오겠죠.

그러나 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를 이런 반전으로 부르고도 우리는 사실 살면서 두려움과 의심을 늘 가집니다. ? 내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에 붙들려 왔는데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건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듣고 믿었는데, 내가 변하는 것 같지 않고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 않고 답이 생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거기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조마조마해 하는 중요한 자리일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로마6,4-7)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나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래서 예수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이 생기는 것은 예수를 믿었으나 내가 시원하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원하게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앞은 내가 믿었으므로, 내가 변화 되었으므로 가 아니라 예수가 죽었으므로, 예수가 죽어 내 지위와 신분과 운명과 지위를 바꿔 놓았다. 예수가 죽음으로, 내 죽음의 운명을 죽음에 묻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내 운명을 부활과 승리로 바꿔 놓았다. ‘그러므로, 너 예수 잘 믿어라. 네가 예수 믿는 게 무엇인지 알아라. 두려워 말라.’

그러므로 앞에 조건이 예수란 말이죠. 그래도 지치죠. 그래도 하다가 문득, 그래도 그걸 알면 좀 더 나아져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안심이 안 되는 자기 수준으로 놀라지요. 8장에 다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입니다. 오늘이 그러므로를 얘기하는 중입니다. 모든 그러므로는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조건으로 예수를, 모든 믿음은 어디로 돌아가는 거냐면, 예수 안으로 가는 겁니다. 예수가 역사 속에 등장하셔서 시간과 공간 속을 살아, 우리 죄를 지어 죽었다. 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거기서 완료되는 것이다.” 로마서가 하고 싶은 이야깁니다.

그때 구원이 되었다. 그런데 우린 왜 이 모양인가? 전에도 한 번 얘기했었던 거 같은데, 이미 완성된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무슨 공식에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망설이고 외면하고 항복하는 과정을,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각 신자들의 현실적인 구원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문제에서 가장 크게 하느님이 이렇게 다 전권을 장악하고 계시고 은혜가 승리한다는 말에 대해서 좋다.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9장에서 11장까지 문제죠.

이스라엘은 저렇게 거부해서 복음이 이방으로 넘어갔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망한 것이냐? “그럴리가 없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중요하죠. 이스라엘이 성공하여 이방에 넘겨졌어야 할, 흘러 넘쳤어야 할 복음이 저들의 실패로 못 넘어갔어야 맞는데, 실패하자 튕겨나가듯이 이방에 갔다. 그게 하느님의 은혜다.

파라오가 모세를 가로막고 하느님을 반대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약화됐느냐? 타협했느냐? 좌절되었느냐? 아니라. 더 커지지 않았느냐?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사건으로 더 커지지 않았더냐? 하느님이 하시려고 하는 걸 누가 막겠느냐? 그래서 11장 마지막에 이런 찬송이 터져 나왔죠.

(로마11,33-36) 33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35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한 점과 한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를 직선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배운 게, 생각이 별게 다 나네요. 직선이 아닌 것은 이것과 겹치지 않는 것은 어쨌든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든가 무슨 찌그러진 것이겠죠. 성경은 그 얘기를 하는 것이죠. 하느님은 직선보다 빠른 길이 있답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게 허물어집니다.

순종하는 자를 받아들이시는 심판자 정도가 아니라, 성경적인 표현으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법적인 잣대, 잘 잘못의 심판자 정도가 아니라, 용서하시어 돌이키시고 회복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저항, 우리의 무지가 그냥 아무래도 좋다고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포기하시지 않고 그것을 엮어 기어코 하시려는 일을 하실 하느님, 그래서 놀라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높이로는 따라갈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하여 감격스러운 고백을 하게 해놓고 이제 결론에 왔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느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이다. 여기서 자비는 뭐죠? 넘어가 주는 것을 쉽게 얘기하는 것 아니죠. 이 자비(慈悲)하심이 얼마나 큰 의지인지 아시겠죠? 오래 참으시고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다시고 그의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관통하여 이루시는 하느님의 부활의 승리,

우리 성경식 표현으로는 피흘려 구원하셨다. ‘피흘려라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개입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성의입니까? 그는 피를 토하며 소리쳤어! 가장 큰 성의와 열정, 하느님은 그렇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하는 얘기죠.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산 제물은 뭐죠? 구원이 현실적으로 죄인된 인생과 하느님의 백성을 어떻게 나누는가 누려보라, 증언해보라, 살아보라. 그 얘기죠.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이고 저렇게 사는 것은 거짓된 길이다정도의 도덕적 비교가 아니라, 영광된 길을 살아 복음을 구체적으로 내 인생에 담아 너 자신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안하면 죽여버리겠다.” 아니라.

여기서 갑자기 이게 조건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돼?”라고 얘기하는 것은 당연한 꾸중일 수 있지만, 마치 그것이 유일한 신앙의 잣대가 되고 자극과 판단과 격려의 유일한 동기여서는 안 됩니다. 각각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됩니다.

처음에 시작했던 것 같이 인생과 세상이 어떻게 헛되며 거짓되며 더러우며 살 가치가 없는가!”라고 확인한 자들만이 구원이 가지는 영광을 사는 것이 보상이나 비교 우위가 아니라, 진정한 명예라는 걸 알게 된다는 의미에서 너희 몸을 하느님이 받으실 산 제물로 드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산 제물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얘기들은 이것과 똑같죠. 여러분 에페소서 5장에 가면, 22아내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25,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느닷없이 거두 절미하고 결혼식 하는데 주례사 이거 해요. 남편에게 복종하시오.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시오. 여인들이 꼭 이 항의를 해요. 바꿔서 책임을 주십시오. 억울하죠. 복종하는 게, 이 복종하라는 느닷없는 요구는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어떤 명분이거나 그렇게 해야 어떤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얘기해도 좋을 전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복 주려고 묶었다. 네 남편을, , 복을 주게 내가 태어나게 하고 길러서 내 짝으로 붙여줬다. 내가 복 주려고. 그렇다. 너 마음 놓고 복종해라. 그러는 너 마음 놓고 네 아내를 사랑해라. 뒤에 가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에페5,26-27) 26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27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부를 온전한 하느님의 영광으로 만들려고 부부를 만들었다, 그거 깨닫는 데는 결혼해서 한 삼십 년은 걸려요. 그게 우리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과 하느님이 만들려고 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커요. 그러나 이제 늙으면 알게 돼요. 늙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원숙해져야 돼요. 지혜가 생기고 안목이 생겨야 돼요.

(에페5,31-32) 31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러므로 형제들아 하느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너희 몸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라.’ 이거는 이 종교를 가지려면 바쳐야 되는 어떤 희생, 어떤 헌신, 이런 것들 아니고, 이건 전적으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아생전에 이 죄악이 관용하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영광을 누리라 그러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명예입니다. 그것 자체로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몰린 것이고 실력이 없어서 그 힘에 밀려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요. 실력이 생기면 거짓말을 아니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을 왜 합니까? 그 방법밖에 없으면 할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실력이 생기면 도둑질 안하고 굶을 수 있습니다. 남의 것 뺏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도덕성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을 굶거나 벌 받는 것으로 훼손시킬 수 없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12장부터는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당연히 뭐와 비교되느냐 하면, 본문 122절에 나오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분별과 이어질 수밖에 없죠. 끊임없이 확인해야 됩니다. 세상의 위협과 세상의 유혹이 무엇인지 알아야 됩니다.

이겨라는 것인데 무엇이 이기는 것일까요? 그 문제에 우린 늘 섭니다. 무엇이 이기는 것일까요? 조금 전에 본 에페소서 4장으로 가면 이 이기는 싸움, 분별의 싸움을 에페소서에서는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에페4,17-24)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22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23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이렇게 들리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건 잘못이야. 이렇게 해야 옳은 거잖아.” 이렇게 들리면 안 됩니다. 간절한 부모의 교훈으로 들려야 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야. 그건 부끄러운 일이야. 그건 무지한 짓이야. 난 철없는 짓이야. 이것은 더러운 거야. 그러는 거 아니야. 예수 안에서 배운 새로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살아. 그게 복이야. 그게 복이야. ”

 

(에페4,22-24) 22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23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건, 열심을 내라는 것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아닌,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허락한 구원이 준 자유입니다. 세상에선 그것을 이해관계 외에는, 자기 의()를 증명하는 것 외에는, 도덕과 법을 쓸 줄 모릅니다.

법도 자신을 위해서 쓰고 도덕도 자기를 위해서 쓰지만 비로소 우리는 법이든 도덕이든 양심이든 상식이든 드디어 예수 안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영광에 종속된 자의 영광으로 삽니다. 거기가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영광된 것은 아주 당연히 도덕성을 가집니다. 도덕성보다 더 나가죠. 자비와 용서, 희생, 사랑으로까지 가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그것을 가지게 된 것이 영광인, 감사로 가지요. 그래서 그것으로 이해관계나 단죄를 위하여 싸움을 위하여 쓰지 않습니다. 비교 우위를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 과정에서 늘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사랑에 대한 불평은 늘 있지만, 그 사랑에 대한 불평을 받아줄 어른이 되는 자리에는 결국 자신이어야 됩니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애들이 보는데, 그게 이제 우리 같이 영어 배운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 안 가는 표현들이 있어요. “Love is open door.” 제 손녀 딸이 그걸 했어요. 그래서 간단하게 무슨 뜻이야?” 뭐 알리가 있나 싶어 했더니, “사랑은 열린 문이라는 거야. 열린 문.” 열린 문에 나가려고 열었다는 거에요? 들어오라는 거죠. 그쵸? 아무나 들어오라는 거죠. 사랑은 열린 문!” 멋지죠? 우린 그 인생을 사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가 뭐예요? 다 해결해 준다고요? 아니요. 짐 지는 법을 가르쳐준대요. 우리 스스로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죽어서 하늘나라 가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누리는 거예요. 그걸 하려는 거예요.

그게 다 이 기본에서 틀리면, 다만 도덕이 되고 종교가 되어 그 이해관계나 심판용으로 쓰게 되고 자신의 명예나 감사로 쓰지 않게 되어 믿는 자의 증언으로가 아니라 강요로 쓰인다고요. 그럼 뭐가 다르냐? 표정이 달라요. 그 사람의 증언이 되면 표정이 좋고 이게 강요가 되면 표정이 무서워요. 그게 복음이에요. 우린 자꾸 에페소서 5, 이런 말을 어떻게 받으실래요?

(에페5,1-2) 1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2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굉장한 말이죠. 쓸모 있는 사람들이라고 안 그래요. 성령이 사랑을 받을 우리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이 하느님이 그것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실 거예요. 신령한 결과를 만들 거예요. 우리는 해결을 해달라 그래요. 뭘 해결해 달라? 이 고통을 면하고 자존심을 세워달라 그래요. 하느님은 자존심을 꺾으셨어요. 바벨론 포로 때 성전 파괴 당하고 예수 보내어 우리 손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자리를 넘어오세요. 그게 사랑이에요.

사랑이라는 명분과 도덕성으로 몰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느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자비하심이 아무래도 좋다는 관용이기보다 얼마나 대단한 성의인가, 의지인가를 보셨어요. 그러니 분별하세요. 세상과 하느님을 따르는 길의 다름을. 어디가 명예롭고 어디가 자랑인가를 보세요. 스스로를 위해서 그러세요. ‘인생은 짧아요.’ 내가 제대로 한번 사랑, 못해볼 거요. 원망만 하다가 일흔이 되요. 아 그럼 안돼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웃으세요.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그러므로 형제들을, 너희 인생을, 너희 존재를 여기에, 이 구원의 진정한 증언에, 구체적인 인격과 생애 속에 담아 살아보라. 그것은 행복한 길이니라. 그것이 구원이니라.’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가 믿는 신앙 고백은 우리 현실의 무엇일까요? 감사해야 됩니다. 그것이 능력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사랑하게 하소서. 용서하게 하소서. 웃을 수 있게 하소서. 살아있는 한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두 손을 벌리고 가슴을 열고 계심을 증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얼굴에 하느님의 사랑이 영광으로 빛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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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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