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4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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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1-28 | 조회수30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연중 제4주일 나해] 마르 1,21ㄴ-28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토끼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으려면 귀를 잡아야 합니다. 닭을 사로잡으려면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사로잡으려면 목 뒷덜미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로잡으려면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어디를 잡아야 그가 내 말을 귀기울여 듣고 내 뜻을 잘 따라주며 나를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줄까요? 그러려면 먼저 그의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한결같은 정성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나도 그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누군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는 나에게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고, 또 따르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말’이란 그 말을 한 사람의 존재와 삶에 연관되기에,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권위를 지니려면 먼저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한결같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그에게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생략한 채 지위나 권력을 내세워 억지로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내가 하는 말에서 권위를 느끼는게 아니라, 내가 아주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밀어내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지니신 참된 권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권위’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엑수시아’는 어떤 일을 해도 되는 자격이나 권리를 의미하지요.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본 이들이 그분에게서 권위를 느꼈다는 사실이 좀 의아합니다. 그분은 전문적으로 율법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기에, 엄밀히 따지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칠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을 가르쳐도 되는 ‘권위’를 느낀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언자가 하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위를 갖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대신 전하라고 사람들에게 파견하신 존재이기에, 예언자가 지닌 권위는 그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지요. 여기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당신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직접 추궁하시겠다고 하셨기에,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같은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큰 권위를 지니는 만큼 그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어떤 경우라도 심지어 자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그 대로만 전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권위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고 파견되신 분이기에, 또한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 말씀만 하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 말씀과 같은 권위를 느낀 것이지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를 느꼈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라는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권위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런 불순한 의도가 드러나지요. 첫째, 그는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나자렛’ 사람인 예수는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그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며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써, 세상 모든 존재와 ‘상관이 있는’ 분이시지요. 즉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주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 뜻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더러운 영은 우리로하여금 너무나도 당연한 이 진리를 의심하고 배척하게 만들려는 겁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께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질문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의미를 왜곡하려고 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요한 3,17)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려고 하시는 일인 겁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은 우리로 하려금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 때, ‘하느님이 정말 너를 사랑하신다면 이러시면 안되는거잖아?’, ‘너를 아프고 힘들게만 하느님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믿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라고 우리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겁니다. 그런 의구심과 불신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 신앙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라며 그 더러운 영의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말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잘 안다고 떠들면서도,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에서는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자기 뜻과 욕심만 쫓는 사람은 감히 주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자주 입에 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자시다”라는 초기 교회 신자들의 오래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드리는 순명으로 응답한 그들의 모습에서, ‘예수님, 당신만이 우리의 구원자 이십니다’라는 그들의 진실된 믿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래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에 대해 아는 바를 열심히 떠들면서 정작 삶에서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산다면,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과 집착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인다면, 그런 우리 입으로 내뱉는 신앙고백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기쁘게 봉사하며,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이라면 내가 먼저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참된 권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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