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주님께 완전 봉헌물이 되게 /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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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2-02 | 조회수24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 완전 봉헌물이 되게 /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루카 2,22-40) 교회는 성탄 후 40일째, 곧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봉헌에는 감사가 담겨야만 할 게다. 아픈 상처를 안겼던 이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 힘이 함께한다. 성모님도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쳤다. 단 한 자루의 초도 정성으로 저 어둠 밝히길 빌면서 봉헌하자. 그 초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언젠가 나에게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르기에.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치를 때,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거기에 성령이 가득 찬 독실한 시메온이라는 이가 있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미리 일러 주셨다. 그는 아기를 팔에 받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빛이며, 당신 백성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시는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성령 계시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요셉의 마음은 먹먹했을 게다. 마리아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얻은 아기 예수가 정녕 인류 구원의 메시아인지 확신 못했을 수도. 그래도 첫 아기를 봉헌하는 두 분이 만난 늙은 예언자 시메온의 고백은 자못 진지하다. “주님, 이제야말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약속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언젠가 이산가족 한 분이 꿈에 그린 가족을 상봉하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본 적 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 꼭 하고픈 일 끝내 이루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자신 삶에서 꿈꾼 바를 다 이루었다는 거다. 시메온이 바로 그 경우다. 그는 선택된 백성이 암흑의 길로 가지만, 정의로운 하느님께서 죽기 전에 구원의 빛을 보여 주실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 그의 눈은 이렇게 그 긴 어둠에서 밝은 빛을, 그 암울한 절망에서 희망을 본 거다. 삶이 너무 괴로우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 하고, 억울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 말하곤 한다. 이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나. 늙은 예언자 한나도 그랬다. 긴 세월 과부로 산 그녀의 남은 의생의 목표는? 아마도 짓밟힌 예루살렘의 영화를 되찾는 날, 한 많은 그 삶에서 하느님만을 섬기며 이 영광의 날만을 기다렸을 게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으실 성모님께서도, 당신 고통을 세상을 위한 보속으로 그 한 목숨을 봉헌하셨다. 오늘 수도자들의 봉헌된 삶은 바로 종말론적 희망, 곧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는 하느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수도자들의 그 봉헌된 삶이 기쁨이 되게 도와주어야만 할 게다. 그분께 세례 받은 우리 역시 기꺼이 봉헌된 삶을 살자. 기쁘고 즐거우면 봉헌이 쉽지만, 고통스러운 일에는 어쩜 그마저 힘들리라. 가끔 이 억울함을 ‘주님께서 주셨다.’라고 여긴다면, 정녕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게다. 그래야만 봉헌의 삶이 은총으로 다가오리라. 이 봉헌의 참 의미는? 시메온처럼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삶이라 하겠다. 우리도 주님께 일생을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국 평생 자신을 주님께 얼마나 봉헌했느냐에 달린 것이리라.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그 순간, 시메온마냥 고백한다면 참 좋겠다. “주님께서는 저를 그 옛날 저 시메온처럼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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