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늘 설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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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2-10 | 조회수38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오늘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 설입니다. 가장 큰 명절일 것 같은데 사실은 추석이 큰 명절이라고 하더군요. 왠지 느낌 상으로는 설이 가장 큰 명절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 하면 여러 기억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어떤 사람이든지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인사를 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관례와 관습에 따라 저도 여러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게 복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또 돈을 많이 버는 게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겁니다. 사실 이것도 복이라면 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당연히 신앙인이라고 해서 이런 복을 굳이 애써서 회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복도 누릴 수 있으면 당연히 누리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다만 이런 복을 누리기는 누리데 이런 복에만 목을 메는 것은 금물일 것입니다. 이건 세상이 주는 복입니다. 세상이 주는 복 때문에 만약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복을 걷어차게 된다면 세상이 주는 복이 되려 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누구나가 세상이 주는 복을 마다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을 할 수 없지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복을 누리지 못할 경우부터 보겠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요? 복도 지지리도 없다고 한탄하며 한 세상을 보내야 할까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확률이 다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반어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복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느님 나라의 복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하늘나라 가는 그때를 말하면 약간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 지상과 하늘나라가 단절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미 하늘나라는 우리 곁에 이미 벌써 와 시작됐지만 우리가 그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인식하려면 먼저 세상이 주는 세상 복에 대한 개념이 속세의 개념이면 당연히 인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환언하자면 하느님이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만히 있는데 그저 주시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해서 받는다고 하는 것도 조금은 이상한 말이 됩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약간은 속된 표현 같지만 적절하기 때문에 표현하겠습니다. 바로 "복 받은 짓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만고의 불면의 진리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통독할 때 이 말씀을 먼저 기억하고 보시면 하나도 맞지 않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맞추어 다시 복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더 정립을 하고 싶습니다. 세상 복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늘의 복은 아주 정직합니다. 세상 복은 약간의 운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복은 절대 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만약 하늘의 복이 운에 좌우되는 복이라면 그런 복은 가짜 복입니다. 또 그렇다면 그건 하느님이 주시는 복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복을 기대하기보다는 주어진 자신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복이 진짜 하늘의 복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맥과 상통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주는 복에 목을 메지 않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은 그렇다고 세상의 일은 등한시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일에도 충실합니다. 세상일도 충실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동경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하늘의 복을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자칫 잘못하면 세상의 복에 가려서 하늘의 복을 보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처럼 복 없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설령 이 세상에서 좀 더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걸 뛰어넘어야 하고 그래야 진정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지금 이 현세에서부터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아시안컵 축구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의 활동상을 보셨는지요? 한 개인의 활동만 언급하겠습니다. 축구라는 게 한 개인만 훌륭하다고 해서 훌륭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한 개인의 기량은 그저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나올 것 같습니까? 물론 타고난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후천적인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언급을 하셨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결승전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그 최선이 바로 이 지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 열심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도 그런 훌륭한 기량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루하루 열심히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방울만큼 결과로 이어졌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나무에서 감만 떨어지기를 바라며 입만 벌리고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복은 머나먼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루하루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하루하루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루할 것 같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지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만 열심히 살면 됩니다.
제가 개신교에 있을 때 좋아한 찬송곡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입니다. 이 제목처럼 그렇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내일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고 그렇게 하다 보면 매일을 충실하게 살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한 세상도 충실하게 살게 되고 그렇게 살 때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열심히 살고 왔다고 팔 벌려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반겨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바래야 할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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