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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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2-15 | 조회수335 | 추천수5 | 반대(1) |
보좌 신부 때입니다. 1994년이니까 어느덧 30년 전입니다. 지구 초등부 교사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 신부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이 말의 텍스트는 시간을 묻는 것이지만 이 말의 콘텍스트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가?’는 질책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의도를 잘 모르고 ‘지금 10시 3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텍스트는 맞지만 콘텍스트는 파악하지 못한 50점 자리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나 머리가 아파!’라고 말하면 남편이 ‘약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텍스트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친정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새로 구입한 청소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정말 두통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맥락의 콘텍스트를 잘 파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집단 간에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콘텍스트를 잘 선점하고, 프레임을 잡는 곳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선거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야당에서는 정권심판, 중간평가라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발목 잡기가 지나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중간평가를 다루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콘텍스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국민들은 텍스트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식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 테러,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두고도 야당과 여당의 콘텍스트는 첨예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규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우려를 발표합니다. 야당은 신상공개, 테러를 벌인 동기, 공범여부, 정당 활동에 대한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당은 경미한 사고, 우발적인 사고, 정치적인 동기는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는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식’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단식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단식에도 몇 가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곤 합니다.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서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때에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가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께서는 세월호의 유족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식의 진정한 콘텍스트는 단식의 행위와 날수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예수님께서도 단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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