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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된 단식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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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6 조회수232 추천수7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깊기만 하면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경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홀로와 더불어가, 관상의 깊이와 활동의 넓이가, 잘 조화되고 균형잡힌’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 논쟁”이고, 제1독서 이사야서 주제는 “참된 단식”입니다. 유다인의 전통적 수행, 자선, 기도, 단식 셋중 하나에 속하는 단식이고 모든 고등종교 전통에 자리잡고 있는 단식수행입니다. 

 

단식하니 식당이 떠오릅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음식점은 얼마나 많은지요. 흔히 “먹자고 하는 일인데...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수도공동체만봐도 먹는 일은 현실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면 곧장 식당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동공동체의 중심은 성당과 식당이라고 합니다. 식당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공동체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주방장 수도자는 수도공동체의 큰 복이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식당에서는 식사食事가 이뤄지고 농장에서는 농사農事가 이뤄지니 말그대로 삼사三事,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식사와 관련된 단식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제4장은 온통 수행덕목들에 대해 74절까지 나열되어 있고, 10-13절까지는 육체의 금욕에 관한 내용들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

 육체를 다스리라.

 쾌락을 찾지 말라.

 금식을 좋아하라.”

 

육체에 끌려가지 말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바로 단식입니다. “금식을 좋아하라”라는 말씀은 영어로 하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Love fasting”(단식을 사랑하라),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마디입니다. 모든 수행생활의 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하는 수행이기보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도생활을, 삶을, 공부를, 기도를, 노동을, 침묵을,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수행의 최고 경지입니다.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행할 때 마음의 순수요 심신의 자유로움에 건강입니다. 수도승들의 영적 아버지라 칭하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중 여덟가지 악한 생가들중 첫 자리에 나오는 것이 바로 탐식입니다. 그 발생학적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식에 이어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나태), 허영, 교만입니다. 가장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음식의 무절제인 탐식이요 식욕을 채운 이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음욕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닦기 힘들다”는 말도 바로 탐식을 경계한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식욕食慾, 이성에 대한 성욕性慾, 물건에 대한 물욕物慾, 인간의 기본적 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은 선도 악도 아닌 현실이며 문제는 탐식貪食, 탐애貪愛, 탐욕貪慾에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악덕의 뿌리인 탐식의 절제의 영적훈련이 단식이요, 수도승전통에서는 “단식을 사랑하라” 합니다.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에서 유혹받았을 때 주님은 40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단식에 대한 능력도 탁월하셨지만 결코 단식을 수행의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권장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금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식 자체가 수행생활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에서 참으로 자유로웠기에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무엇보다 분별의 지혜를 요하는 단식이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적절할 때의 단식입니다. 자칫하면 에고를 부풀릴 수 있는 자기중심적 단식이 될 수 있을 것이요 경쟁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점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축제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절한 때 단식이 있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야할 축제인생을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단식의 관행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매주 2차례 월요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세례자 요한 제자들은 자주,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은 평소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으며,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에 의하며 예수님 사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단식했다 합니다. 오늘날은 밥을 안먹는 금식禁食보다 고기를 안먹는 금육禁肉이 더 적절하다 싶습니다. 너무 많이 고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남판단하며 죄짓는 교만보다 더 낫다는 영적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가는 온갖 불순한 것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 이미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나팔을 불지 않는’ 이웃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단식, 겸손한 단식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겸손한 단식, 겸손한 수행 자체가 보상이요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다합니다. 참 좋은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이사야 예언자가 통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체를 환히 밝힙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로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100% 공감하셨을 내용입니다.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환히 밝히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자기도취의 이기적 단식이 아니라 불쌍한 이웃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들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에 이어 이런 자발적 사랑의 실천인 참된 단식이야말로 단식의 최고봉입니다. 이런 겸손한 단식, 사랑의 단식, 참된 단식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이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빛같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런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인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단식 자체가, 침묵 자체가 답이 아니라 사랑의 잣대가 답입니다. 배곺은 자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하고, 말할 기회가 없는 홀로 있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아닌 말을 하게 해야합니다. 정작 단식해야할 이들은 많이 먹어 비만해 있는 이들이요, 침묵해야할 이들은 말 많이 하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못먹어서 병이 아니라 무절제하게 잘 많이 먹어서 병도 많습니다. 먹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살기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워해야할 것은 탐식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께 맛들여 참된 단식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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