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유혹을 이겨야만 은총이 / 사순 제1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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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2-18 | 조회수17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유혹을 이겨야만 은총이 / 사순 제1주일 나해(마르 1,12-15) 유혹을 받는 것과 그 유혹에 넘어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어쩌면 유혹을 느끼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책임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물리치고 이겨 낸다면, 더욱 풍성한 은총을 받고 좀 더 성숙할 수가 있는 계기를 마련하다.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이에게는 영광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유혹하신다. 어떤 이는 부로, 어떤 이는 가난으로 유혹하신다. 그분께서는 부유한 이는 가난한 이에게 아낌없이 베푸는지, 가난한 이는 그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견뎌 내는지를 보신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고 나서 성령께서는 세례 받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는데 이를 극복하셨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분 시중을 들었다. 그 후 갈릴래아에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며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부터 광야에서 오랜 기간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그 비참한 십자가 위에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라는 유혹을 받으셨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 생애 전체가 유혹과 시련이었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그분께서 바라시는 길을 가셨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에게도 발달된 과학으로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우리 삶 구석구석까지 스민다. 이는 자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친교와 사랑의 공간을 앗아 갔고, 가치와 의미의 상실을 가져왔다. 이렇게 끝없는 탐욕과 쾌락으로 이끌고 급기야는 돈의 노예로 만든다. 날마다 욕심, 쾌락, 돈의 유혹에 사는 전쟁터와 같다. 더구나 예수님을 충동질한 사탄일진데, 우리라고 그냥 둘 리 만무하리라. 그분께서 유혹받으셨기에 어쩜 우리도 유혹받는 건 당연할 수도. 이처럼 예수님께서 받은 그 유혹처럼, 우리에게도 의당 유혹이 있을 게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기 싫다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막무가내의 그 기분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그렇지만 이 험난한 세파에서도, 영적인 삶을 살려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늘 하느님 뜻을 헤아려서, 그분께서 바라시는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야만 할게다. 그 길 끝에 하느님 영광이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잘 극복하시고는, 아버지 뜻을 당당히 선포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철저하게 광야를 체험하셨기에 드러내시는 선포다. 우리도 사순 시기만이라도 광야를 체험하며 하느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만 하겠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셨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 고통도 내치셨다. 이 사순 시기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유혹의 극복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첫걸음이다. 사순 시기에 잘못되어 버려야 할 삶을 묵상해 회개하자. 그리고는 내 삶에 깊이 들어와 계시는 주님 손길을 느끼자. 이게 뜻깊은 사순 시기를 지내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나를 만드신 분은? 믿는 우리는 자신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종종 광야로 가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주님 은총이 함께하기를 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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