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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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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28 조회수115 추천수3 반대(0) 신고

 

아마 며칠 묵상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오른 손가락 반 정도에 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다음주 월요일에 마산에서 큰 병원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사실 어제 레지오도 못 갈 상태인데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이 레지오 전단원 연속 3회 백프로 출석하면 짜장면 사준신다고 해서 제가 짜장면 때문이 아니고 다른 단원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다만 신부님께서 열심히 사목하시려고 하는 그 의지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금 우리 단원들이 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 짜장면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힘든 상황인데도 미사도 가고 참석했습니다. 어떻게 강복을 주시려고 오셨다가 신부님께서 제 손동작을 보셨는지 손에 대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짜장면은 옛날에는 표준어가 아닌데 지금은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어서 짜장면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실 때 저는 사실 놀라웠습니다.

 

오래 전에 서품을 받으셨지만 외국 유학과 신학교 교수님으로 계셨고 본당은 제 본당이 처음입니다. 부임하시고 첫주일에 저는 그때 저녁미사를 갔습니다. 화한이 성전 마당 입구에 있었는데 아마도 추측하건데 동창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보내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낀 표현인데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대충 이런 표현이었습니다. “본당 처음이제. 쫄지마이런 표현이었습니다. 격려의 표현이었는데 처음 이거 보면서 웃으면서 이거 혹시 본당에서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하면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누가 이런 걸 했지 하고 아무튼 미사를 참례하러 갔습니다.

 

지금 신부님은 의욕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처음 부임하시고 나서 본당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목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고 신자들이 걱정할 까봐서 그런 노파심을 사전에 원천봉쇄시켰습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열정으로 4년을 본당에서 그때까지 지금과 같은 열정으로 사목해 주신다면 저는 본당 몇몇 신자들한테 본당의 상태가 침몰하는 중인 본당이라고 했는데 신부님께서 반전을 시켜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제조건이 지금과 같은 열정이 식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 복음 사업이 아니라 세상 이치로도 당연히 사필귀정입니다.

 

세상에서도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에 따라 그 조직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선장 말입니다. 만약 그당시 정치적인 변수 모두를 배제시키고 선장이 뛰어난 판단을 했다면 자기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많은 학생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얼마 전 있었던 축구국가 대표 감독 경질에서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사실 오늘 지금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을 합니다. 35년 만에 해보는데 힘드네요.

 

가능하면 부활까지는 묵상글을 계속 하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실 묵상할 포인트가 많이 있지만 오늘 복음 말씀을 마치 예수님이 본당 공동체에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셔서 사목하시면서 신자들에게 해 주시는 훈화 말씀처럼 인식해 본다면 어떨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에 본당 주임으로 오셨습니다. 전임지는 하늘나라입니다. 전임지에서 신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고민을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인간 세상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멸망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 것입니다. 이 죽어가는 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오로지 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외아들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아니 어떤 사람도 세상일을 위해서 아무리 그게 좋은 일이고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자식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애비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부 하느님의 특명을 받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 그 특명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세상 공동체는 절체절명의 위기 의식은 없고 젯밥에만 눈이 멀어있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주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건 내가 줄 자리가 아니고 성부 하느님의 소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운명예정설처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오늘 이 부분에 묵상의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마치 형식은 예정설 같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미루어짐작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세상의 지위라든지 자리는 위치 때문에 탐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일명 감투 욕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라는 본당 공동체에서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단호히 말씀해 주십니다. 마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에둘러 성부 하느님께 전가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자녀는 그 자리가 그런 자리가 아니고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섬기는 자리라는 것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단순히 그냥 섬기는 게 아니고 목숨을 바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도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을 만나게 됐을 때 우리의 자리는 하느님의 우편으로 가게 될 것이 마치 세상일에도 사필귀정이 있듯이 하늘의 법도도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는 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한 생각입니다.

 

이건 어떤 특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 의무입니다. 만약 특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면 우리가 복음을 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사람만이 내 곁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곁에도 머물고 싶고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에서 굴림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렇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지근거리에서 만나고 싶으면 세상에서 자신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길 중에 하나가 쉽지만은 않지만 남을 굴림하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든지 나보다 더 상대를 섬기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영광의 화관은 주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오늘 묵상이 아주 길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에 너무 머리를 많이 썼는지 배가 많이 고프네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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