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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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2-29 | 조회수13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습니다. 오늘 전례력을 보고 독서와 복음을 읽고 다른 날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묵상을 해봅니다. 먼저 아직 보진 못했습니다만 잠시 굿뉴스 상황을 봤습니다. 제목만 봤습니다. 베네딕도 형제님의 글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기치사죄’ 죄명이었습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과 또 형제님이 사용하신 세상 죄명을 잠시 언급하면서 제 묵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만약 천상에서 세상 형법으로 재판을 한다고 했을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자로에게 유기치사죄를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내용만으로는 유기치사죄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을 뿐입니다. 첫째는 유기의 고의가 없습니다. 또 위법하지 않습니다. 형법상 범죄 성립의 세 요건 중에 두 개가 조각사유입니다. 다만 정황상 책임은 미성년자라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책임은 조각사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부자가 문을 열고 어떻게 외출을 하려고 하는데 나자로를 목격을 해서 불쌍한 마음에 나자로를 데리고 들어와 조금 먹을 것을 주다가 괜한 일을 하는 건 아닌가 해서 다시 나자로를 문 밖으로 나가게 한 후에 예를 들어 계절이 겨울이라 추위에 동사를 했다면 그땐 유기치사죄가 성립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때는 처음에 어쨌든 라자로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 이상 보호를 하게 된 보호의무가 있다고 법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는 이런 경우에 표현하는 방법이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보호의무인수라는 그런 개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법리로 봤을 땐 그런데 왜 천상에서는 죄가 없는 부자에게 고통이라는 형벌이 가해지는지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단순히 부자였다고 해서 고통이 주어진다면 만약 이 세상의 모든 부자는 두려워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자는 원칙적으로 보면 복음에서는 어떻게 재물을 모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단순히 부자라는 사실만 언급돼 있습니다. 세상에는 성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근검절약해서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을 방탕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흥청망청 살았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열심히 살아서 부자가 된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로만으로 다음 생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그런 논리로 접근을 한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로 접근한다면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용어를 사용한 걸로 봐서는 부자는 다음과 같이 인식했을 것입니다. 라자로를 자기 형제한테 보내 경고해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어떤 경고를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까요? 단순히 부자로만 살면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경고였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한 정황을 봐서는 부자로 산 게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고통받는 이웃과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을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해 주기를 바랬을지 모를 일입니다. 부자가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사실로 볼 때 치명적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치명적으로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일러줘야 믿을 것이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한 말을 우리는 주의 깊게 묵상해볼 점이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모세와 예언자의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만약 부자가 살아서 지금 우리의 모습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재물은 내가 노력해서 이뤘다고 해도 이건 순전히 내 노력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고 이것도 다 하느님의 보살핌과 은총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 은총을 다른 사람과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논리로 추론한다면 세상에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세상으로 나갈려고 할 때 나자로를 봤다면 당연히 나자로를 보살펴줬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는데도 부자가 죽어서 고통을 받았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상급을 받았을 겁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이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나옵니다만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다고 합니다. 오죽 했으면 성경에까지 언급될 정도니 얼마나 교활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복음도 자기의 상황에 맞게 합리화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내용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을 많이 실천하였는가 하는가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한 말입니다. 이 하나의 말에 어떤 사람은 다른 말씀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수단으로 인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자기가 하느님께 바치는 재물이 인색한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마치 이런 식으로 복음을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해서 생각하며 표현한다면 이런 사람도 오늘 독서에 나오는 교활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이런 걸 묵상하고 싶습니다. 죽은 나자로가 지금 나에게 와서 뭔가 경고를 해 준다면 과연 어떤 경고를 해주고 갈까 하는 것을 묵상해본다면 의미 심장한 묵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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