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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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3-07 | 조회수10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루카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웃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나 상황이 한편으로는 웃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슬프다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보통 누군가가 실수를 저지를 때, 혹은 뭘 잘 모르고 하는 어수룩한 행동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이 ‘제3자’에게는 일종의 ‘헤프닝’으로 보여 웃음을 주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당혹스럽고 괴로운 ‘잔혹사’로 기억되지요. 그럴 때 ‘웃프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즐거움과 슬픔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군가에겐 즐거움으로 여겨지고 다른 누군가에겐 슬픔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즉 즐거움도 되고 슬픔도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일어날 순 없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삶에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면 그 빛이 사방을 밝혀 어둠이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도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내면에 선한 측면과 악한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또 마음 상태와 의지에 따라 그 중 한 가지 측면이 발현되는 겁니다. 내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여 내 마음 속에 사는 선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그 늑대가 지닌 선한 본성이 곧 나의 모습이 되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모함하는 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상식마저 무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을 보고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악으로 악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한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 마음 안에 신앙의 빛, 기쁨의 빛을 밝혀주셨는데, 그 안에 아직도 어둠이 남아있다고 우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 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빛 속에 머물든지 아니면 어둠 속에 머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요. 그리고 빛 속에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면 그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들과 감당해야 할 것들이 생깁니다.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나 쾌락을 누리는걸 포기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을 고집하는걸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오해와 모함, 시기와 질투, 미움과 박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자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종말의 순간 주님과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그분의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저 좋은게 좋은거라는 식으로 산다면 세상에서는 책임과 처벌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처세술이 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불효’가 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만 안지으면 되는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과 그분 뜻을 위해 먼저 용서하고 기꺼이 희생하며 기쁘게 사랑하는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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