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5,17.30)
저는 2008년 심장 절개 수술open heart surgery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외부 기계의 도움을 받은 채 심장에 얽힌 바늘들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요.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수술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고, 아주 긴 시간의 수술이 끝난 다음 회복실로 옮겨지고 그곳에서도 몇 시간 동안 의식이 깨어날 때까지 홀로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마취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느끼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음을 저는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땐 이미 제 어머니는 돌아가셨기에 그런 상태에 있는 저와 함께하지는 못하셨겠지요. 하지만 이사야 말처럼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49,15) 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셨다고 믿으며, 사실 의지적으로 어떤 기도도 할 수 없었지만, 저는 무의식적 상태에서 제 존재 자체로 기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저를 “위로하시고, 가련한 저를 가엾이 여기셨다.” (이49,14) 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때 중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내 여동생 안나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어난 후에 알았습니다. 사랑은 이렇듯 자신을 필요한 어떤 누군가와 함께 있음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신” (5,30)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살리시는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자 안식일에 벳자타의 환자를 치유한 까닭에 본의 아니게 유대인들한테서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이며 거울입니다. 주님은 그러기에 언제나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아들도 일하며” (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자신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5,19)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 곧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 보다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겠지만” (5,24)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당신의 심판은 올바르다.” (5,30)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 운동을 지향하고 생명을 죽이는 죽음 문화를 배척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에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치유하여 들것을 걷어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 금지규정을 어기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삶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저희와도 분명히 다른 길을 걸으셨고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자신보다는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이 자기 삶의 시작이며 마침이었기에 그토록 매 순간, 매일 얘를 쓰면 사셨던 것입니다. 어느 노래 가사의 ‘전쟁과 같은 사랑’이란 말마디처럼 예수님은 전쟁하듯이 매일 매 순간을 처절하고 진지하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왜 그렇게 사셔야 하는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사신 까닭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이 본디 자신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혹 떼러 갔다 혹 붙여 온다는 말처럼 이 말씀을 빌미로 사람들의 화를 더욱 북돋우어 이젠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에다 하느님 아들이라고 신을 모독하는 죄’까지 덤터기를 쓰게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처절하게 사셔야만 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분의 의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시선이나 관심은 아빠 하느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10번 사용하였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7번 사용하였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유독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주제는 예수님 메시지의 중심이자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드러난 하느님이신 아버지는 한 마디로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다음 복음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3,16) 그러기에 세상에 파견되신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 구원 곧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다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그대로 하신 것이고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까닭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3,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오늘 복음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견 목적을 드러내 밝히십니다. 결국 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즉 아버지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고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아들이신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시는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5,19~21)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신 당신의 사명과 맡기신 일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의 하나 됨인 구원임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5,24) “주님, 당신처럼 우리의 삶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살리는 삶이 되게 하여주시고, 저희의 관심이 언제나 저희의 뜻이 아니라 저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완수하는 데 힘쓰게 하여주시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늘 저희와 함께 하여주시고 저희 또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