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죽음 후의 생명마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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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3-21 | 조회수11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죽음 후의 생명마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요한 8,51-59) 어느 수녀님이 친구 수녀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참석 후 이야기다. 그 어머니는 여든아홉으로 선종하셨다. 평소 고인의 뜻인 시신을 기증한 터라 묘지까지 갈 필요 없이 장례미사로 모든 것이 끝났다. 장례가 너무 짧아서인지 한편으로 허망했다지만, 수녀님은 삶과 죽음이 다른 게 아닌 하나라는 걸 깨달았단다. 허나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은 삶과 죽음을 분리로 보는 그들과 하나라는 예수님과의 차이일 게다. 그들에게는 죽음과 함께 다 사라진다고 보고 있다나. 그렇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안에 모두가 살아 있는 존재였다. 삶과 죽음이 하나였기에. 이처럼 그분 영원성에는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도 다 하나다. 따라서 주님에게는 삶과 죽음의 분리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살고 죽든지 주님 것이리라.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이 확 줄리라. 이러니 나이 들수록 죽음을 삶 안에 두는 것을, 늘 생각 한단다. 현대의 정신 질환의 중요 원인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게다. 여기서 해방되려면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길밖에. 그것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에게서도 명쾌한 해결책이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나셨지만, 유다인들은 그것을 몰랐다. 우리는 내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하루살이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을 자주 본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 정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선언하셨다.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이므로, 누구도 감히 이 신앙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유다인들에게는 큰 모독이었다. 신앙의 눈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저 너머도 보고, 또 영혼의 저 깊은 존재도 꿰뚫어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분을 언제나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이처럼 우리 삶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죽음도 그분 뜻 안에 달렸다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죽음 없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정녕 믿어야만 했다. 사실 사람들끼리의 계약은 어떤 경우에는 이득도, 때로는 손해도 볼 게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결코 손해가 없다. 우리가 계약에 성실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실 게다. 바로 고통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이다. 그러기에 참 생명의 주관자이신 그분께 의탁하는 믿음이 없다면, 분명 불안을 느끼리라. 사순 시기를 은총의 시간이라는 이유도, 이 기간에 지난날의 습관과 무거운 허물에서 벗어나 온전하고 생생하게 살아가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게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완고하게 거부하듯이, 우리도 지난날의 나쁜 습관이나 그릇된 선입관, 기계적 사고방식 등에 묶여 자신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할 기회를 놓치곤 한다. 이 은총의 시기에 진정 빛나고 생기 있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아보자. 예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선언은 우리 지성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숨겨져 있던 당신의 비밀을 계시하신다. 신앙의 진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체험으로 알아듣게 되니까. 우리는 십자가 진리를 체득하고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만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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