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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제자가 되어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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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27 조회수436 추천수10 반대(0) 신고

-“예수님 처럼, 예수님 따라 살기”-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앞서 주님의 첫째, 둘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더불어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 하느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신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거듭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이요 교회 전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

 나를 의롭다 하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자 누구인가?”

 

그대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듯합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렇게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살면 되겠습니다. 성주간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깊이 고뇌하셨을 것이며 이런 예수님 덕분에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데 유익한 조언이 됩니다.

 

“내가 초대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초대해야 한다.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꺼내라.”-다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논어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산”은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상호보완의 사랑과 신뢰관계를 보여줍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저에게 한결같은 불암산은 참된 제자의 모범도 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다짐하며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고 노력한 정주의 삶이요 더불어 떠오르는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역시 여전히 새롭게 공감하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불암산이다.”-2006.4

 

말한마디 천냥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정작 마음이 지치고 다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며, 예수님처럼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날마다, 아침마다 겸손히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복음과 신약 서간에서도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순종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

 

새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인생은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의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필립비 서간 역시 비움과 순종, 겸손으로 요약되는 제자의 모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스럽게 묘사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예수님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참제자이자 참사람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추구해야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이런 제자상과 비교하면 오늘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모습은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며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배신자 유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는 우리 제자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인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했을 때 전전긍긍 반응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위기중에 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혼자 남겨두고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유다에 대한 탄식이 우리에게는 깊은 충격과 더불어 크나큰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성서에 따른 것일지라도, 유다는 결코 그의 배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비교가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둘의 차이는 단 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고, 유다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가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어느 총명한 어린이가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유다는 목을 매단 나무를 잘못 골랐어요. 무화과나무를 골랐거든요.”

놀란 교리교사가 

“그럼 뭘 골랐어야 했을까?” 

물었을 때 어린이의 대답이 정말 기막힌 명답입니다.

“예수님 목에 매달렸어야죠!”

무화과나무에 매달려 자살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예수님의 목에 매달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과 더불어 주님께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는 정말 베드로처럼 용서 받았을 것이라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음이 유다의 결정적 패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결같이 경청과 순종, 비움과 겸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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