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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_송영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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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29 조회수137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4,14-16;5,7-9).”

<여기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순종하심으로써 고난을 겪으셨습니다.”입니다.

순종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난을 통해서 그것을 배우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직역이 아니라 의역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사도들이 ‘십자가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말도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깨달음과 믿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고 정리했습니다(히브 2,17).>

이제 우리도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면, “십자가는, 이미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겪으셨던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셨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닌가? 왜 자꾸만

십자가 사건을 회상하고 기념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지만,

우리의 회개와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반복해서 묵상하는 것인데, 그것은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고 방법일 뿐입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십자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옛날의 어떤 죄수의 사형집행일 뿐일 텐데, 믿는 우리에게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십자가가 나타내는 모든 의미와 가치와 상징들은

부활 때문에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의미 없는

‘허망한’ 고통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부활을 믿으면 인내할 수 있지만,

안 믿으면 인내할 이유도 없고, 인내할 힘을 얻지도 못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왜 꼭 십자가이어야만

했는가?” 라고, 또는 “왜 꼭 그렇게 참혹하게 고난을 겪고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라는 질문의 답은 “모른다.”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든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0.14-15.17-18).”

단순하게 표현하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신 일’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완전히 물리치고 정복하셨음을

드러내는 일이 부활입니다.

 

4)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는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또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출처]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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