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부활 체험에도 단계가 있다: 우선 내가 왜 우는지 알아야!> 복음: 요한 20,11-18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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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100억 이상을 버는 인기 강사 이지영 선생도 중3 때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고 부모님은 동시에 암에 걸리셨고 심지어 지하에 사는데 홍수 물까지 들이닥쳐 옷가지는 물론 그동안 필기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선배가 버리고 간 교복을 입고 남들이 빌려준 연필과 노트로 공부하고 있는 그 비참함은 누가 봐도 살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지영 학생은 국어 수업 중에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잡아주려니 생각했겠지만, 선생님은 화장실 빨리 다녀오라고만 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건물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못 뛰어내리겠더랍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삶은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인생 두 번째 전환점은 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배우며 한 대법원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 용의자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본인도 자살 시도하며 죽여달라고 하고 검사나 모든 여론이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지만, 대법원 판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것에 착안하여 재판 때 피고인에게 “자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열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쏟았고 대법원장은 자신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던 이지영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나누며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이유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를 먼저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울고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스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돌려달라고 청합니다. 아직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만났습니다. “나의 선생님”(라뿌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게 나를 이끌어줄, 나의 이름을 불러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돈을 버는 곳에, 애인에게, 혹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다 써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에서 보듯 알려고만 하면 믿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가 헛된 곳에 소진되게 됩니다.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어 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맨날 똑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이 우울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연애가 안 돼서 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발견하고는 ‘스승’이 없어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 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살펴봅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잡아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책이라도 읽어봅시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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