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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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4-07 | 조회수14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요한 20,19-31)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장 갈릴래아로 가셨다.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 방에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다. 당시 그들은 유다인들을 피해 숨어 있었단다. 그들 심정은 스승을 외면하고 도망쳐 버린 죄책감,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까 두려운 공포심 등, 한마디로 그분과의 지난 관계를 생각조차하기가 극도로 두려운 상태였으리라. 그런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먼저 다가가 평화의 인사를 던진다. 이어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제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는 새로운 만남이었다. “야, 베드로, 끝까지 나를 따르겠다고, 그래 봐라.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내가 말했지! 그리고 나머지, 너희들도 내가 이곳저곳 끌려 다닐 때는 다들 어디로 갔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에게 짜증도 낼 만하였으리라. 그렇지만 자비의 예수님은 며칠 전 그 고통은 아예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들 중 유일한 쌍둥이인 토마스는 안타깝게도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사실 여러 제자 중 형제는 몇 있지만, 쌍둥이는 그 혼자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동생인지 형인지는 모른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찾아 베타니아에 갈 때에도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동료들을 선동한 다분히 의리 있는 쌍둥이였다. 또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그분께 제자들을 대표해 강력히 따지기도 한 열정의 제자였다. 이에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눈으로 그분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대꾸하였다. 이렇게 그는 미지근한 신앙보다는 의심을 해서라도 따져본 후 제대로 믿겠다는 자였다. 어쩜 불신앙이 가득 찬 우리네 이웃 모습이기도. 그로부터 며칠 뒤 토마스도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대뜸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님의 이 자비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며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다. 사실 지금 우리도 하느님을 그저 습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토마스는 부활하신 스승님을 뵈었다는 동료들 말에, 그는 눈으로 본 것만을 믿겠다고 대답했다. 확인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음을 고백한 셈이다. 따질 것은 따진 후에야 확실히 믿겠다는 거다. 이처럼 단호한 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서는 용기 있는 믿음의 길을 걸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게다. 우리 신앙인도 가끔은 눈앞에 당장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라지만, 정녕 그것이 두려움을 줄이거나 의심을 버리는 상책만은 아니리라. 진정한 믿음은 직접 확인하는 것만이 아닌, 삶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여정이기에 하기에. 그러나 우리도 가끔은 의심한 토마스의 마음이기도 할 게다. 따라서 분명히 기억하자. 그 옛날 토마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이 외침이 여전히 이 시각에도 우리 귓전을 잔잔히 스쳐간다. ‘보고서야 믿느냐? 안보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함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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