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