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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묵상 시리즈 제24강] 율법과 십계명 2/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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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0 조회수129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호수♡마리아추천 2조회 8824.04.09 11:25댓글 2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제가 이 강론 녹음을 하루 전날 한다는 걸 알고 계시죠?

여러분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들으시겠지만, 나는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녹음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 목요일 저녁입니다.

여기서 청주까지가 1시간 한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지금 며칠째 계속 청주를 왔다 갔다가 하니 좀 많이 피곤하네요.

전 시간에도 얘기했듯이 동창 신부님 임종이 가까웠다고,

그래서 마지막 살아있을 때 한번 보려고 다녀왔고 그다음 날 새벽 1시 40분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화요일 저녁에 갔고 수요일 새벽 1시 40분경 떠났으니, 삼일장이면 내일이 장례죠.

오늘은 청주의 성유 축성 미사 때문에 아침 일찍 또 나갔다 왔죠.

은퇴하고 밤에 늦게 자는 습관이 생겨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좀 버겁습니다.

내일도 장례 때문에 아침 일찍 또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달릴 길을 다 달린 우리 동창 신부님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지 않고

‘고생했으니 이제 내 곁으로 와라.’ 하시며 불러가신 것 같습니다.

오늘 성유축성미사 하면서 다른 신부님과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 기억으로는 신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 치른 날이 미사가 없는 날, 다시 말하면 성금요일인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랬더니 맞는 것 같대요.

그래서 내일 동창 신부님은 장례 미사를 못 드립니다.

그냥 신부님들이 10시에 모여서 사도 예절, 고별식이라 그러죠?

한평생 참 열심히 잘 살았는데 지지리 복도 없나 미사도 못 받고.

이렇게 고별식으로 보내네요.

또 오일장으로 하면 이게 부활 대축일이죠.

성주간에 세상을 뜨면 직천당한다는 말은 있지만, 가려면 좀 이틀 먼저 가든지, 부활지 나고 가면 될 텐데 유감입니다.

내일 가서도 사제단이 다 모여도 성금요일이라 미사가 없어요.

알고 계시죠?

고별식만 하고 장지로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제2계명을 얘기하겠습니다.

2계명이 성경에 이렇게 나오죠.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우상의 첫 번째 시작은 나무라 그러죠. 나무를 만든 우상이라고 그럽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쇠로 무엇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제일 만만하고 편한, 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이 나무이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조각한 그 나무를 언제부터 숭배하게 되었을까?

그 외에 우상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책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브라함의 두 가지 일화가 쓰인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런 얘기가 나오죠.

 

아브라함의 부친은 우상을 만들어 팔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청년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늘 못마땅하고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출타하신 중에 손님이 우상을 사러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묻습니다. ‘손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손님이 올해 60이라고 대답하니, 아브라함은 뭐라고 대답했느냐?

‘60이 되신 당신이 6시간도 걸리지 않고 인간이 만든 이 목상을 숭배하시다니, 이 목상이 당신을 축복해 줄 것 같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그 손님은 어이가 없어서 돌아갔다 합니다.

 

또 한번은 부친이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우상 몇 개가 망가지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물었겠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시침을 뚝 떼고

'사실은 이 나무 신들이 음식을 가지고 서로 뺏고 싸우다가 다쳐서 전부 다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뭔 소리냐? 바보 같은 놈아. 생명 없는 우상이 어떻게 싸울 턱이 있느냐?’

다시 아브라함이 ‘그러면 생명 없는 우상에게 생명 있는 인간이 머리를 숙이고 공경하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 건지 압니까?’

이렇게 아브라함은 부친에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일화입니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우상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죠.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다.’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자기의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그 우상에게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는 사람이 구원하는 존재다. 이렇게 하는구나.’

구약성서에 인용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얘기했죠.

우상의 개념이 뭐냐?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떡하고 버티고 있는 것은 전부 다 우상이다.

그래서 그 우상은 구약에는 나무라든지 쇠로 이렇게 모양을 만드는 걸로 나오지만, 현대판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 정신적인 우상이 훨씬 더 인간을 많이 지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오늘 하루 종일 하느님이 첫 자리에 계셨느냐? 아닐 수 있죠.

하루 종일 내가 받은 상처와 싸워서 머릿속에는 온통 그것에 대한 분노가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 중요한 우상이라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리, 즉, 첫째 자리에 좌정하고 계실 때, 은총의 비는 자식에게 내려갑니다.

하느님에게 내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하느님께 올바른 기도는 하지 않고 자식 걱정만 하고 있다면,

은총의 비가 밑에서 위로 올라갈 수는 없죠.

하느님을 우리들이 첫째 자리에 모시고 올바른 경배를 드릴 때그때 은총의 비는 내가 청하는 것 위에 풍요롭게 내린다

그 뜻입니다.

자식을 걱정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걱정하는 것과 기도는 다르죠.

피정에서도 많이 얘기 드렸죠. 걱정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걱정하면 마귀만 들끓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들으신 적 있죠?

저도 사제생활하면서 맞는 얘기 같습니다.

아무튼 2계명의 핵심은 ‘하느님이 첫째 자리에 계셔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 외에 어떤 다른 것의 형상을 본떠 만들지 마라.’

여기서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개신교에서는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안 계시지요, 그것이 우상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성모마리아상도 다 우상이다.

바로 요 대목을 갖고 개신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거죠.

 

개신교 십자가는 예수님이 안 매달려 계십니다. 그냥 십자가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한 가지 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을 당시에는 분명히 황금으로 만든 소가 하느님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질 않았습니다.

주님을 히브리어 말로 ‘주님이(Ado nay)라 불렀죠, 뜻은 ‘강한 분’이죠.

그래서 강하다니 아마 황소처럼 강할 것이라 해서 황소의 모습을 만들어 하느님처럼 여겼죠.

이렇게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마음대로 편한 대로 생각했죠.

달리기를 잘 하실 거다. 힘이 셀 거다. 등등 아무튼 여러 가지 형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 가셨죠? 33년 동안.

유령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하느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돌아가실 때 매달려 계신 것을 십자가라 우리는 얘기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개신교에서는 우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십자가 자체는 흉물 덩어리였고 사람을 말려 죽이는 사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아주 모진 형벌이었죠.

죽여도 아주 처절하게 죽이는 피를 말려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그 위에 예수님이 올라가심으로써 흉물 덩어리인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된 겁니다.

우리는 집에 있는 십자가에 예수님 양옆에 있었던 좌도와 우도 십자가를 같이 걸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 2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모습을 그대로 십자가에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2계명에 나오는 ‘ 땅 아래 땅 위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라는 구절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좀 전에 얘기했듯 바로 이 시대,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줬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 계신 것이기 때문에 그건 절대로 우상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 위에 말을 올려놓거나 소를 올려놓은 것이 아니죠.

 

또 성모상도 우상이라 하면서 예전에 어떤 과격한 개신교 신자분이 밤에 성당에 와서 성모상을 부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 태극기 앞에서 애국가 부릅니다.

펄럭펄럭하는 천에 여러 가지 궤를 그리고 태극 문양을 그려놓은 태극기.

‘국기에 대하여 경례’하면 군인들은 경례하고 국민은 가슴에 손을 얹습니다.

그 펄럭펄럭하는 헝겊데기가 우상입니까?

아니죠. 상징입니다. 심볼(symbol).

우리들이 고귀하고 절대적인 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약한 부분이 많기에

뭔가 그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상징이 필요하다는 거죠.

성모마리아상 석고입니다.

천주교 신자 그 누구도 성모마리아상 자체가 살아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모상을 보면서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던 구세주의 어머니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하와였던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는 거죠.

집에 돌아가신 부친 사진이 걸려 있을 때,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 사진 자체가 무슨 우상이 아니죠.

 

그래서 성경을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도 문제고, 또 너무 글자 그대로 믿는 펀더멘털리즘(fundamentalism),

근본주의 역시 또한 성경을 우리들이 읽고 배우는 데 있어 경계해야 할 사조입니다.

이해되시죠?

개신교 신자들 집 십자가에 왜 예수님이 안 계시냐 따질 것도 없고요.

제 유튜브는 개신교 신자분도 많이 들으신다고 해서 그 뜻을 오늘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천주교 신자 집에 가서 속으로라도 ‘우상숭배하고 있네, 성모 마리아 상으로 우상 섬기고 있구나.’

그런 얘기를 안 하시는 것이 더 지혜롭고 더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3계명은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 계명도 참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 나쁜 건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신앙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그랬을까?

결국 여기에 대한 답은 ‘함부로’라고 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함부로’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 그 근본적인 자세가 바로 문제라는 겁니다.

경솔하게 버릇 없이 야훼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얘기겠죠.

 

그러면 우리가 매일 올리는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 청원의 기도 등 모든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죠.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기도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도할 때 살아있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가?

심장은 뛰고 있지만 뇌가 죽은 것을 뇌사라고 합니다.

뇌사 상태에서 우리 기도 바치고 있지 않는가?

하다못해 로사리오 기도드릴 때도 몇 단은 정신 차리고 드리지만,

그다음부터는 그냥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온갖 분심 잡념 속에서 드리지는 않는가?

또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기도는 아닌가?

 

우리들의 미지근한 신앙 태도를 생각해 볼 때 사실 세 번째 계명은 두려운 계명입니다.

우리는 더더욱 하느님에게 경건하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네 번째 계명이 무엇이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일요일은 학교가 휴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일요일 학교를 안 가는지, 왜 휴일인지를 모르고 삽니다.

달력에는 7번째 날은 빨간 글씨로 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일곱째 되는 날은 쉬셨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로 하셨다고도 기록되어 있죠.

그래서 안식일은 단순하게 근무나 영업을 멈추고 놀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이 하루를 몸과 마음을 조용하게 하느님께 향하게 하기 위해 있는 날이 안식일이죠.

일하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 외에 세속 일로 마음을 혼란시켜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안식일을 굉장히 엄수합니다.

안식일에는 부부가 동침하는 것도, 불을 때서 식사 준비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 안식일은 1km 전후밖에는 출입도 못 하죠.

그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때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70년대인가, 안식일에 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아십니까?

그냥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싸움보다 소중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조용하게 싸우지 않고 죽어갔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을 사수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은 계속되고 있죠.

그런 걸 보면 그전처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에 대해서 긴 세월 동안 규칙이 늘어나고 함부로 복잡해졌죠.

또 형식적으로 돼버립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잘못을 철저하게 바로잡으시고 율법의 정신을 다시 한번 명시하셨던 겁니다.

 

이상 십계명에 제4계명까지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명시돼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앞에 진실할 것’,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근원입니다.

하느님 앞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인간 상호 간의 약속을 어떻게 지키고 계율을 어떻게 엄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믿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이라면 중대한 약속도 안심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이 나태하고 거짓에 가득 찬 사람과는 처음부터 아무 약속도 안 할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자고 결정지어도 지켜줄 심산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느님을 거룩하게 생각하고하느님을 경외하고하느님 앞에 진실할 때,

비로소 부모를 공경하고살인하지 말고간음하지 말라 등등의 계명도 이루어진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기본으로 많은 율법을 규정하였지만,

우선 제1계명에 하느님에 대한 자세를 제시한 것은 지도자다운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바로 하느님의 법이고 하느님이 선언한 법이죠.

 

다음 시간에는 제5계명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댓글
  • 09:10 새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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