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_송영진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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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1 | 조회수15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1-36).”
1) 이 말씀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설명(증언)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하늘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34절).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이라는 말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라는 말은, 신앙과 상관없는 ‘인간의 지식이나 학문이나 예술 같은 업적들’은 모두 땅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입니다(34절). 이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성전 경비병들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라는 말도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라는 간접적인 증언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루카 4,32).” 라는 말도, ‘예수님 말씀의 힘’에 대한 증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힘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힘이기도 합니다(마르 1,27). 마귀들의 힘은 ‘죽음의 힘’인데, 그 ‘죽음의 힘’은 예수님 말씀의 ‘생명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증언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36절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쓴 목적’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이나 얻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비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도 하느님 나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4) 36절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지금’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상태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금 무슨 벌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받지 못하는 것은, 벌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에서 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출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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