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3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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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4-14 | 조회수18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부활 제3주일 나해] 루카 24,35-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하여 마음이 상했으면 그 일은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일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할 일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지요. 반면 누군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면 그 일은 마음 깊이 담아두고 꾸준히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 그가 나에게 베푼 자비를 나도 남에게 베풀 기회가 왔을 때 미루거나 핑계 대지 않고 즉시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는 이 속담에 반대되는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망각의 강에 흘려버리고, 나 자신을 아프게 만들 뿐인 원수는 마음에 품은 채로 두고두고 미워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다보니 자기 삶에 기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슬프고 아픈 것들만 계속 쳐다보면서 ‘세상이 왜 이모양이냐’고 불평 불만만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지옥같은게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가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런 이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되시자,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기 안위를 지키기 위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자기도 반대자들의 손에 붙들려 죽임을 당할까봐 걱정되어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문을 다 걸어잠근 채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으니 그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법도 합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한 짓이 있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당신께 저지른 잘못을 비난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이제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대신 제자들이 두려움과 좌절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꼭 필요한 힘인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시련과 고통은 물론이고 죽음마저 극복하신 주님께서 자기들 앞에 직접 나타나시고 힘을 주셨으니,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 어떤 걱정과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자기들도 주님처럼 부활하리라는 커다란 희망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 속에서 이 고된 세상길을 기쁘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자기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스승님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기쁘기도 하고, 이미 돌아가신 분이 자기들 앞에 멀쩡히 살아계시니 놀랍기도 한데, 정작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셨다는 것을 명확한 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그들의 마음이 세상의 규칙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에 마음이 단단히 붙들려 있으면 그 사실에 어긋나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그분의 시신이 무덤에 묻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고정관념과 편견이 생깁니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그 말씀을 그저 비유로, 자기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자기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댑니다. 마음을 열고 그 안에 주님을 받아들여야 그분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일종의 인지 부조화가 생겨버린 겁니다.
제자들의 그런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부활을 통해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시어 그럴 이유나 필요가 없었는데도, 굳이 그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순명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번 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신 주님께서, 의심과 불신으로 마음이 닫혀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또 한 번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겁니다.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신 목적은 다른 한 편으로 그들에게 ‘최후의 만찬’ 때의 기억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시 전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주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심판의 날까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따르기 위해 그 특별한 식사 예식을 꾸준히 거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상기시켜주신 그 특별한 식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입니다. 성찰과 회개를 통해 영혼을 깨끗이 준비하고, 주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분께 마음을 열면 우리는 부활하시어 이 미사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은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성경에 담긴 말씀을 그저 옛날 이야기로, 나와 상관없는 남 얘기로 여기면, 아무리 자주 많이 들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 참된 깨달음의 힘으로 유혹을 이겨내고 죄를 멀리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이끄시기 위해, 주님께서 미사라는 기쁨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시어 성경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먼저 마음으로 믿어야만, 그 말씀 안에 담긴 그분의 속뜻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처음엔 그분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가,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난 뒤에 비로소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그런 ‘말씀의 신비’에 대해 요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믿는 이, 말씀에 담긴 당신 뜻 안에 깊이 머무르고 그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렇게 내 안에 주님을 담고 그분을 닮아감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요.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고 희망하는 ‘부활’의 의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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