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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_이영근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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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5 조회수190 추천수3 반대(0) 신고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6,8-15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11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또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기고 나서, 느닷없이 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기에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14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우리 또한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5)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빵'은 이와 같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을 생명을 위해 먹는 것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 곧 성찬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안전과 보장, 편리와 유익만을 바라고 참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당신 목숨을 건네시는 ‘예수님’께 목숨 걸고 있지 않다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군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그렇습니다.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바로 그 양식을 지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

여기에서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들'(εργα)은 복수로 자신들을 주어로 제시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하느님의 일'(εργον)은 단수로 하느님이 주어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들이 믿는 일로 제시됩니다.

결국 그분이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함을 의미합니다.'(교리서 1069항)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일하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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