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영원한 생명은 오로지 믿음으로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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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4-15 | 조회수23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영원한 생명은 오로지 믿음으로 / 부활 제3주간 월요일(요한 6,22-29) ‘그들이 “하느님 일에는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현존하신다. 예수님은 그 사랑 우리에게 주시려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바라신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선물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그것을 가질 수 있을지? 우선은 그분 말씀 실천하는 거다. 즉 이웃 사랑과 용서하는 일이다. 미운 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신의 미운 지난날도 용서의 대상이리라. 그기에 미운 감정이 숨어 있다면 그 전 관계로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출발을 계속할 수 있다. 미운 감정은 없어지지 않는다. 세월은 약이 아니고 마취제일 뿐, 그 상처는 언제라도 재발할 게다. 미움이 있더라도 잘되기를 빌어 줄 수 있는 게, 첫 단추인 용서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게 두 번째이다. 시작이 반이라나. 하느님 기운이 함께하는 용서는 큰 축복이다. 용서하면 자신을 둘러싼 나쁜 기운이 물러간다. 힌두교는 고통을 운명으로 돌리면서 체념하라지만, 불교는 피해야 할 것이라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정면으로 받아들이란다. 예수님은 고통이 은총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십자가 지라신다. 그러니 우리는 시련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 보게 되리라. 아무것도 아닌 자신 모습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뜨게 되리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 주실 때에는 고통이라는 보자기에 싸 주신다라나.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보자기 열다 그만둔다. 안을 들여다보기 두렵기 때문일 게다. 끝까지 열면 필요한 선물이 있는데도, 그걸 모른다. 자신 몫인 십자가는 없어지지 않는다. 내 것이라 여겨 받아들여야 그 십자가가 은총으로 바뀌리라. 주님께서 주신 이 십자가는 자신의 존재에만 초점 둔 게 아닌,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뜻하니까. 물론 이는 삶에서 기본 욕구가 충족된 뒤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꼭 그러한 일차적인 것에 반드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왜냐면 이는 우리 의지만이 아닌, 하느님의 도우심이 언제나 함께하기에. 배고픈 것과 목마른 건 다르다. 우리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음을 깨닫자. 육체가 먹어야 한다면, 영혼도 살쪄야 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 먹이실 때, 그 빵은 분명 육체를 채워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로 그분께서 깨우쳐 주려 한 건, 당신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성장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참된 양식이라는 거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영혼육신을 채운다. 우리는 가끔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주실 것이라 믿어, 그것들로 우리를 채워 주시기를 원할 때가 많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헛된 욕망을 보시고,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만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고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은총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에너지이다. 기도와 선행에 힘쓰면, 누구나 체험하는 힘이 되리라. 끊임없이 믿고 산다면, 누구나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느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믿고,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과감히 버리자. 그분을 믿기만 하면 두려움은 절로 없어질 게다. 따라서 하느님 일 하려면,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우선 당당하게 믿는 것임을 분명히 명심하자. 우리는 그분 부활을 믿은 사도들의 후예자임을 잊지 말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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