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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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6 | 조회수27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신 삶-
4월16일이 되니 304명 희생자를 낸 10년전 4.16세월호 참사 사건이 생각납니다. 이날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해지며 말문을 잃게 됩니다. 오마이뉴스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염원 3645일, 고 박수현 군의 아버지 박종대씨>의 글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0년전 2014년은 제가 원장직을 내려 놓고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을 지내던 중이었고 당시 이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 성주간에 맞이했던 상상을 초월한 비극적 재앙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은 되지 않은 상태로 피해 가족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성주간 이었고, 오늘은 부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부활의 기쁨, 신록의 기쁨중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0년전 세월호 참사요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기일전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가급적 빨리 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재의 난국을 생각할 때 저절로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국내 상황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길을, 방향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잃고 방황중이라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을 찾아야, 잡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제가 피정지도시 늘 강조하던 내용도 생각납니다.
1.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꿔져선 안된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날로 가치관 부재의 혼돈 시기에 하느님 믿음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해 갑니다. 참으로 단절의 불행과 비극의 시대, 무엇보다 신앙유산의 전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삶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우선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돈을 필요 이상으로 쌓다가는 돈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 진정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작은 일상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다산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명심보감
작은 일상에 만족하는 일, 재물에서 초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일치를 이루기 까지는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 뿐입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절정의 말씀이 오늘 복음 후반에 나옵니다. 주님은 어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라 힘쓰라 하신후,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청은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의 궁극적 소망이요 이에 대한 주님의 통쾌한 응답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늘 이런 생명의 빵을 모셔야 비로소 충만한 삶,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뿐 답이 없습니다. 바로 얼마전 교황청 사순시기 첫째 강론 주제도 이 성서 구절이었습니다. 일부 핵심적 내용을 나눕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 빵을 발견할 수 있나? 미사와 성서이다. 고대 교회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인정했다. 오직 후대에 서방에서 그리스도교의 분리가 있었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성사적 해석이 우세함으로 끝나자, 루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명의 빵인 하느님의 말씀편에 섰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사간의 원래적 종합으로 회귀해야 한다. 바로 최근 일어나는 종교일치 운동도 이런 분위기다. 때로 성서와 성사가 신학에서 대립될지라도 그들은 전례 안에서 늘 ‘평화로이’ 공존해 왔다. 교회의 맨처음부터, 미사(Mass)는 ‘말씀과 성체(the Word and the Eucharist)’ 둘을 포함해 왔다.”
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명쾌한 설명이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 미사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완성에 이른 스테파노입니다. 과연 우리는 몇% 예수님을 닮아있는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스테파노의 대를 잇는 사도 바오로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시 그의 겉옷을 곁에 놓고 스테파노의 순교장면을 보면서 충격과 더불어 깊이 배우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삼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고 싶습니까? 유한한 인생 여정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일년사계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를 생각하면 잠자는 시간도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회개하기도, 기도하기도, 공부하기도 턱없이 짧은 세월,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닮의 여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임종어나 묘비명을 좌우명 삼아 써놓고 이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글도 생각납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밤 빛나는 별,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만을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종교였다”-2005. 5
수도원이 한참 어려움을 겪던 시기 자신을 정리해봤던 묘비명이 생각나 나눴습니다. 어제 문득 수도원 방문시 집무실을 찾아 강복을 받던 수녀님에게 수도명을 물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의 이름 앞에 말마디 라이너 수녀입니다. 독일어로 라이너 뜻은 ‘맑은’이라합니다.”
맑은 수녀 모습대로 조촐하고 맑아보였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예닮의 여정중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맑고 향기로운,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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