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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문(門)이다”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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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22 조회수248 추천수6 반대(0) 신고

 

-문을 드나듬의 축복(祝福)-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시편43,3ㄱ)

 

어제 4.21일 성소주일, 아침부터의 각별했던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요즘 신록의 아름다움이 절정입니다.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나 믿음의 색깔이 있다하면 아마 이런 신록의 새깔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파스카 축제시기, 파스카의 기쁨은 신록의 기쁨입니다.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늘 주일 아침마다 부르는 찬미시편 노래이지만 1시간 찬미로 주일 하루를 여니 참 행복하고 기쁜 아침이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요즘입니다. 아침 정갈하면서도 아름답고 풍부한 식사에 식사후 주방장 형제에게 감사의 덕담 인사를 드렸습니다.

 

“천국에서의 아침식사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천국의 주방장같습니다.”

 

참 하느님 섭리의 신비가 오묘합니다. 20대시절 10여년간 왜관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분인데 사정상 퇴회하여 세속에서 결혼후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다가 약40년후 은퇴하여 나이 70을 넘어 수도원에서 주방봉사를 하며 수도원에 머물게 됐으니 오랜후에 고향집에 돌아온 듯 기쁘게 지내는 분입니다. 결혼생활과 수도생활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각별한 축복입니다. 

 

또 하나 나눔의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영산홍꽃이 한창입니다. 정말 진분홍색깔의 그 강렬함은 장관입니다. 꽃말을 살펴보니 첫사랑이었습니다. 하여 24년전 옛 자작시 “성 요셉”에 이 첫사랑 말마디를 넣은 것을 시적 감성이 풍부한 도반이 참 멋진 시화를 만들어 전해줬고, 고단한 “광야여정”중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의 오아시스”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요즘 들어 참 많은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활짝 핀 진분홍색 영산홍꽃을 배경한 성 요셉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성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영산홍꽃!

 

 꽃말은 

 첫 사랑이라네”-2004.4

 

지금은 나이 60 환갑을 바라보는,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옛 제자와, 조카가 보낸 답글도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선생님과 신부님 두 명칭답게 살아야 함을 다시 배웁니다.

 

“선생님, 시가 너무 아름다워요, 요셉 성인의 사랑을 말하는 듯합니다!! 첫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을 품고 있네요. 항상 선생님의 시는 편암함을 줍니다. 감사드려요. 선생님!!! 건강하시구요. 편안한 밤 되세요.”

“삼촌 신부님 시는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아, 이 모든 은총으로 빛나는 깨달음과 풍부한 나눔, 순전히 파스카 예수님의 은총임을 깨닫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깨달음의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도 또 얻어 넘치는 것이다.”(요한10,9-10)

 

“나는 문이다!” 예수님의 선언은 얼마나 은혜로운 구원의 복음인지요! 예수님은 벽이 없는 사면팔방 활짝 열린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하늘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문을 드나들면서 날마다 강론을 길어 올립니다. “문이냐 벽이냐?”,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한 때 열광했던 말마디들입니다. 

 

제대로 성장중인 영적 사람들이라면 벽은 날로 넓은 문으로 바뀌겠지만 많은 경우는 점차 방어의 벽은 커지고 문은 날로 작아질 것입니다. 과연 나는 문입니까? 벽입니까? 벽은 점차 커지고 문은 점점 작아지지는 않습니까? 이웃이 답답해하면 벽이고 편안해 하면 문일 것입니다. 문이라하여 다 좋은 문이 아니라, 멸망이나 죽음에 이르는 지옥문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이듯 문도 선택입니다.

 

“나는 문이다!”, 바로 하느님께 이르는 주님의 문을, 하늘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 지혜의 문, 생명의 문, 자유의 문, 평화의 문, 믿음의 문, 희망의 문, 평화의 문, 기쁨의 문, 행복의 문, 구원의 문, 무수한 명칭을 지니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바로 주님의 문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 무수한 교회의 성인들은 이 주님의 문을 발견하고 수없이 드나들며 끊임없이 축복을 받은 분들이며 지금도 무수한 신자들이 이 주님의 문을 드나들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감격을 노래한 행복기도란 제 자작 기도문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 시 또한 주님의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을 드나들며 깨달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멋진 지혜로운 깨달음도 바로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지혜의 문을 드나들며 얻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의 보고에서 잘 들어납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번도 제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주님 지혜의 문을 드나들면서 이런 놀라운 은총의 체험과 깨달음이 참으로 베드로를 활짝 열린 자유인, 지혜의 문이 되게 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놀라운 분별력의 지혜도 주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제 매일 강론 역시 이에 해당됩니다. 마지막 베드로의 겸손한 발언이 지혜의 절정이요 결정타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통쾌한 완벽한 승리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승복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제 벽이 문이된 예루살렘의 보수파 신자들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11,18)

 

이제 다른 민족들도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구원의 문을 드나들며 축복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바로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문으로 들어와 주님의 정화와 성화은총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시편43,4ㄱ).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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