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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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4-26 | 조회수18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받아들이며 따르는데에 자유의지를 사용하면 하느님과 함께 그분 섭리 속을 걷는 ‘은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반면 자기 욕망을 채울 방법을 찾고 타인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며 세상에서 성공하는데에 자유의지를 사용하면 하느님이 계시는 곳 정 반대로 나아가며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부터 멀어져 죄악의 어둠 속을 헤매는 ‘고통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걷는 길이 은총의 길인지 아니면 고통의 길인지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하느님 뜻을 잘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엉뚱한 길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반복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올바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게 맞는가?’ ‘혹시 잘못된 길에 빠져 허송세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풀어야할 신앙의 숙제, 삶의 숙제에서 ‘정답’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정답’인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만만치 않지요.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자기 고집을 꺾어야 하는 길이며, 자기 취향과 바람을 포기해야 하는 철저한 순명의 길이기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다른 길’을 찾게 됩니다. 원래 길은 하나가 아니지 않느냐고, 그래서 내비게이션도 길을 잘못 들으면 다른 길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분명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보다 조금 더 쉽고 편한 길이 있을 거라고…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그분의 뜻과 섭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믿는 천주교는 ‘계시종교’입니다. 불교처럼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 구도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구원의 진리를,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어 보여주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게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인 겁니다. ‘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진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알레테이아’(áληθεια)는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일”을 뜻하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본모습과 속마음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면, 그렇게 드러난 하느님의 참모습과 뜻이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이 되고 지켜야 할 계명이 되며 우리가 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물을 얻게 되지요.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쉽고 편한 세상의 길에 한 눈 팔지 말아야겠습니다. 애초에 그 길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세상의 논리는 구원의 영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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