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님_2024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 |||
---|---|---|---|---|
이전글 | 괴력의 사나이 삼손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 |||
다음글 | 인연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26 | 조회수240 | 추천수4 | 반대(1) 신고 |
병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병실을 돌며 병실 청소를 합니다. 그가 맡은 병실 중에는 싸움에 휘말려서 몇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지요.
그날도 이 병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년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하게 청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른 병실 청소로 옮기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에서 이 청년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자기 아들 병실을 왜 청소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소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금 전에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청년 병실에 들어가 청소했습니다. 다시 청소한다는 것에 어떤 불평이나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동안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픔에 쉽게 감정이 동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상황 자체보다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불가능할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사진설명: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