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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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4-27 | 조회수209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2024년 04월 27일 토요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 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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