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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벨탑 이야기 1/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_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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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30 조회수221 추천수2 반대(0) 신고

신부님의 글은 있는 그대로  아멘.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편안하셨습니까?

 

창세기 이야기 중에서 다섯 번째인 바벨탑 이야기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화요일입니다. 미리 녹음하는 거죠.

어제 눈이 밤새 많이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참 이쁘게 있었어요.

어쩌면 올해 들어 마지막 눈이 아닐런가 생각이 들어, 휴대폰이 아니라 큰 카메라로 녹기 전에 사진을 좀 찍어놨습니다.

나중에 작품 전시할 때 나올 수 있겠죠?

몇 개는 압축해서 카톡과 카페에 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 눈은 수분이 많아 빨리 녹았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를 한 번에 할지 두 번에 끝낼지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얘기하다 딴 이야기가 생각나면 좀 길어질 수도 있겠죠.

 

여러분들 제 동생 중에 사제가 있는 거 아시죠? 소나무 신부라고 부릅니다.

일본 교구에서 사목하다가 작년에 은퇴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머니와 같이 인천에 같이 살고 있죠.

동생은 일본 교구 소속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아니라 일본 교구 소속의 사제로서 살았기 때문에,

교포들을 위주로 사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성당으로 나가서 사목했죠.

그런데 일본도 워낙에 노령화가 되어 성당에 나가보면 다 나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일하러 온 사람들부터 외국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많을 때는 한 12개국 정도 다문화 성당이죠.

다문화 성당이지만 한국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는 곳에서도 동생은 사목했죠.

그리고 동생이 성당을 옮길 때마다 제가 가서 피정 지도를 하고 왔습니다.

또 저도 어떤 성당인가 궁금하기도 했죠.

가보면 주보가 일본어와 영어로 된 것, 크게 두 종류가 있고요.

주일 강론은 일본어로 강론하고 바로 이어 영어로, 그 뒤를 이어 스페인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강론 시간이 좀 길어졌죠.

그리고 제가 피정을 시킬 때도 일단 내가 한국말로 하면 동생이 일본말로 통역했죠.

물론 거기 와 있는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일본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피정 때는 일본말을 하는 일본 사람들 위주로 피정을 시켰습니다.

 

동생이 사목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자꾸만 바벨탑이 생각이 났죠.

언어가 분명 하나였다고 했는데 어떤 놈이 주도해 바벨탑을 만들다가 하느님한테 혼난 거지?

성경에 보면 언어가 많아진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나 상이 아니라 분명히 벌이었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이었겠죠.

 

동생이 있는 본당에 갈 때마다 동생을 통해서 강론한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말을 배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또 배워봐야 얼마나 깊이 배우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말은 배울 용의가 있어도 일본 말은 배울 용의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90년대에 중국 선교 다녔던 것 여러분들 아실 겁니다.

5년은 조선족들을 피정시켰고. 또 5년은 한족들을 피정시켰습니다.

한족들은 중국 사람들이죠.

한족 피정 지도할 때 조선족 통역하시는 분이 제 한국말을 중국말로 전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 느리죠.

내가 몇 줄 한 다음에 번역해서 전달하니, 저도 전달을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했죠.

그러면서 내가 중국말을 좀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면 통역이 필요 없을 텐데 하면서,

중국말 좀 배워야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에 오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있어요.

내가 재미난 얘기를 하면 통역하시는 분은 그것을 들으면서 웃으세요.

그리고 나한테 들은 얘기를 중국 사람들한테 전합니다.

저는 그걸 지켜보면서 내 이야기가 몇 프로나 전달될까,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 사람들도 웃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조선족들이 모르는 말들이 있죠.

예를 들어서 조선족들은 남편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나그네라고 그러죠.

이렇게 조선족 자체가 한국말을 100% 다 이해 못 하니, 분명히 통역하시는 조선족 회장님을 통해서

중국 사람들한테 전달되는 것은 많아도 60% 아니면 반 정도밖에 전달이 안 될 터인데,

그분들이 웃어야 할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울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걸 보며 ‘인간의 언어로 전달이 되지 않는 부분은 성령의 언어로 전달되는구나! 그래서 저렇게 웃고 우는구나!’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신부님, 중국 가서 중국 사람들한테 고백 성사 주십니까?’ 물어요.

준다고 하니, 그러면 중국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중국말로 훈계할 텐데, 어쩌냐는 겁니다.

훈계는 생략입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중국말로 고백 성사 볼 때 저는 추임새만 놓습니다.

그리고 죄는 고백소 안에 계신 예수님이 직접 들으시는 거죠.

고백 다 끝나면 묵주 보이면서 ‘한 번 해라, 두 번 해라.’ 이러면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사죄경은 한국말로 하죠.

그래서 저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고해성사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권에서는 제가 영어를 좀 하니 영어로 성사를 주고 영어로 훈계 줄 수 있습니다.

미국에 피정 지도 나가면 영어로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거기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감정 전달이 되질 않습니다.

문장을 문법에 맞게 쓰고 대략 뜻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제가 한국 신자들한테 피정할 때 쓰는

여러 가지 문장, 단어, 그리고 형용사들. 이런 것들을 영어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한국 신부가 미국인들 피정시킨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몇 배의 준비도 필요하고, 준비한 것에 비해서 전달하기는 또 몇 배로 더 힘이 듭니다.

다만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내가 아무리 영어를 하더라도 전달이 되지 않는 부분은 성령께서 함께하시어

여기 앉아 있는 미국 사람들한테 필요한 은혜 내려갔을 거라고 믿으면서

자아도취 하여 혼자 떠들면서 피정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바벨탑 만든 그 주동자, 그놈이 그렇게 밉습니다.

 

분명히 누가 분명히 바람을 넣어서 힘 있는 놈이 바벨탑을 만들기 시작했을 터인데.

그래서 그때 당시에 힘 있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고 제가 성경을 한번 찾아봤습니다.

찾아봤더니 바벨탑 이야기 바로 전 10장 8절에 센 놈이 하나가 나타납니다.

‘구스에게서 니므롯이 났는데 그는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그는 야훼께서도 알아주시는 힘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야훼께서도 알아주시는 니므롯 같은 힘센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힘이 세다고 하는 것은 권력이 있다는 얘기죠.

권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바벨탑을 만든 주동자의 이름이 10장 9절에 나오는 니므롯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바벨탑 만든 주동자가 니므롯이었다면 그 한 인간 때문에 언어가 이렇게 수백 가지로 만들어져

서로 힘들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저는 강사고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더 절실하게 언어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물론 요즘은 번역하는 앱이 있죠.

얼마 전에 태국에 가서도 제가 태국말을 배워야 할 이유도 없고, 태국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간단한 것은 앱을 통해서 물어보고,

또 태국말로 답을 들으면 한국말로 화면에 뜨더군요.

‘야, 이 앱만 있으면 전 세계를 다닐 수 있겠다. 밥 굶지 않겠고 길 잃어버리진 않겠다.’

또 요즘 나온 최신형 휴대폰에는 동시통역 기능이 있다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미국 사람과 통화할 때, 미국 사람이 영어로 얘기하면 내 스피커에서는 한국말로 들리고,

내가 한국말로 얘기하면 그것이 동시통역이 돼서 미국 사람한테는 영어로 들리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고 그래요.

저도 좀 관심이 있습니다.

온 세계가 같은 언어라면 누구와도 자유로이 말을 나눌 수 있으니 무척 즐거울 것 같지 않습니까?

 

구약성서 창세기 11장 1절에서 9절에는 세계가 서로 다른 말을 쓰게 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짧기에 제가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장 1절부터죠.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언어가 많은 언어로 나누어졌던 겁니다.

만일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도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었을 겁니다.

일본어도, 프랑스어도, 영어도, 히브리어도, 그리스어도 없었겠죠.

또 당연히 외국어 과목은 세상 어느 학교에도 없을 겁니다.

학생들이 단어 카드를 보면서 공부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진학도 굉장히 편해질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일보다도 사람들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각국 상호 간의 우정도 진실한 것이 되고 국제 문제도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훨씬 더 선한 쪽으로 발전했을 겁니다.

 

나는 그런 일을 생각하여 역시 세계는 하나의 언어를 쓸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합니다.

언어는 문화입니다. 문화가 언어에서 나오죠.

또 언어는 사상입니다. 사상이 언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쓰면 같은 문화를 공유하게 되고 같은 사상을 공유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면 전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훨씬 더 줄어들겠죠.

그러나 세상은 그 하나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그 하나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결국에는 뭡니까?

잘난 체하는 오만 때문에 교만 때문에 생긴 비극입니다.

 

4절에 이런 얘기가 나왔었죠.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도록 하자.’

이 바벨탑을 샀던 사람들의 소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원이 뭡니까?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는 겁니다.

높은 데 올라갈수록 자기들의 명성이 커지기 때문에 ‘하늘까지 한번 가보자.’

그들의 그 소원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성도 탑도 도중에 포기했고 오점만을 남기고 또 이름도 내지도 못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들이 말하는 하늘은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건가?

그들이 말한 하늘은 어디를 가리키는 건가?

여러분들 산을 보고 있으면 산 바로 위에 하늘이 보이죠.

어찌 보면 산이랑 하늘이랑 닿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산에 오른다고 해서 하늘에 손이 닿질 않습니다.

하늘은 한없이 높은 겁니다.

앞에 보이는 저 산이랑 하늘이 닿아 보인다고 해서 탑을 저 산만큼 쌓으면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 참 바보스럽죠.

이렇게 오만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인간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자기 영역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영역에까지 뛰어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바벨탑 만든 인간들은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한 높이에 두고자 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이 항상 빠지기 쉬운 오만한 태도며 또 이미 빠져 있는 오만입니다.

 

이 바벨탑 이야기 들으면 누구 생각납니까?

아담과 하와 생각나죠.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은 어째서였습니까?

‘이 열매 먹으면 하느님과 같이 선과 악을 아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뱀에게 유혹되었기 때문에 먹었던 거죠.

바벨탑의 인간들은 이처럼 동일한 실수를 또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유혹, 하느님과 동일화하고 싶다는 이 오만을 하느님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만이 첫째가는 인간의 죄악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 것은 다 잊어버려도, 자기 집 현관문 비밀번호는 잊어버릴 수 있어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영적인 것들이 있죠.

바벨탑의 인간들은 자기들의 첫 번째 선조들인 아담과 하와가 왜 낙원에서 추방됐는지,

무슨 긴 세월이 흘렀다고 벌써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동등해지려는 아담과 하와의 그 짓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들뿐이겠습니까?

누구나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저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어제 결심하고 오늘은 벌써 그 결심이 무너지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한 일도 다음 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속담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뜨거운 물도 목젖만 넘어가면 뜨거움이 잊어버려진다.’

참 재미난 얘기입니다.

 

이 바벨탑의 인간들은 굉장히 과학적이고 신기한 것을 개발해 냅니다.

3절에 그렇게 나오죠.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래서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이 말은 인간의 지혜가 그 시대로서는 최고로 발달했다는 과시가 나타난 겁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 발명할 때마다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리석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발명한 겁니다, 개발한 겁니다.

그러나 이 개발이, 발명이, 진보가 인간을 더 어리석게 만듭니다.

뭐 하나 발명해 놓고 사람보다 위대한 존재는 없다, 나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자만에 빠집니다.

돌 대신에 벽돌 쓴 것 가지고, 흙 대신에 역청 쓴 것 가지고 엄청난 지혜가 생긴 것으로 착각합니다.

지혜를 드러내고 싶어서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자고 하느님의 영역에 뛰어들어서

인간의 그 알량한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던 겁니다.

성서에 ‘이름을 내자’는 얘기가 나오죠.

‘이름을 내자’는 것은 하느님보다 자기들의 이름이 세상에 숭배받게끔 하고 싶은 욕망을 뜻합니다.

 

여러분들 고속도로 타고 쭉 올라와 서울에 진입할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요?

남산타워도 보이고요.

또 다른 쪽에서 진입하다 보면 정말 높은 빌딩이 하나 보이죠.

롯데 빌딩이라고 그러죠.

저는 그 옆을 지나가면서 또 멀리서 그 어마어마하게 높은 빌딩을 볼 때마다

인간의 능력을 감탄하기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것을 볼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떠오른 것이 반지 제왕에 나오는 무슨 탑이죠?

그 탑 이름을 잃어버렸는데 눈알 뱅글뱅글 돌아가는 그 탑과 바벨탑이 자꾸 떠오릅니다.

물론 그 건물을 지을 때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바벨탑처럼 하느님의 영역으로 뛰어들려고 건축한 것은 당연히 아니겠죠.

아무튼 저는 그 건물을 볼 때 평화롭고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바벨탑이 자꾸 떠오릅니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진 때문에 쓰나미도 굉장히 강하죠.

지진이 유난히 많은 지역은 높은 빌딩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을 짓더라도 엄격하게 내진에 합격 검사를 받아야만 완공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진도 7도 8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지진이 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담이지만, 저 혼자 그냥 그 높은 빌딩을 보며 바벨탑을 떠올리면서 혼자 생각한 것은,

지진이나 화재가 일어나면 도망칠 곳도 없는 고층 빌딩은 정말 현명한 사람이라면 생각 해내지 않을 건축법이다.

911, 미국에서 났을 때 보셨죠?

워낙 높은 곳에 사무실이 있으니, 밑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사람들이 유리창에 매달렸다가 수백 미터 밑으로 그냥 뛰어내립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집은 단층 건물이 아니겠는가?

또 여담이지만, 제가 이제 퇴행성 관절염이 조금 있다 보니, 2층에 경당 만든 것을 요즘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1층에 집이 좀 길어지더라도 만들 걸, 가파른 계단을 내가 언제까지 오르내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튼 층이 높을수록, 고층 건물만이 아니라 대도시의 모습에서 역시 또 하나의 어리석음을 저는 느낍니다.

왜 인간은 저렇게 무리하게 한 곳에 모여들까?

그리고 태양의 빛을 받는 권리라든지, 흙 위를 걷는 권리를 빼앗겨도 불평도 말하지도 않고,

땅속의 지하철, 땅 위에 고속도로를 달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이것이 참뜻의 ‘지혜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일 하느님께 알아보고 만든다면, 하느님이 이렇게 가련한 환경에 인간을 살게 두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바벨탑 이야기 1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바로 ‘오만’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 깊숙하게 박혀 있는 뿌리째 뽑기 어려운 오만과 교만.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그리고 어설프게 발명한 것개발한 것으로

하늘 끝까지 탑을 쌓겠다고 하는 이를 데 없는 그 인간의 오만.

크기야 다르겠지만 색깔과 종류는 다르겠지만 우리도 그런 오만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꾸 까먹습니다그리고 같은 죄를 자꾸 번복하죠.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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