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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요한 16, 12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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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7 조회수244 추천수2 반대(0) 신고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두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16, 13) 
                  
세상 살아오면서 알아야 할 것은 그 알 때가 되면 알게 되지만 그때가 이르지 않으면(=겪어 보지 않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제 엄마는 가끔 섭섭하실 때 누이들에게 이렇게 표현하셨지요. 너도 시집가서 애 낳으면 에미 속 알꺼여!, 라고 말한 다음엔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겪어보고 부딪혀 보고서야 우리는 늦게 깨닫는 게 인생살이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세상사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들은 말의 의미와 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가 어찌 지상의 일도 아닌 천상의 일을 들었다고 다 들어 알겠으며, 보았다고 다 보아 알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그토록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예수님의 의중의 표현인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았건만, 정작 중요한 수난의 예고 앞에서 무엇을 말씀하신 지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느냐?, 라는 표현이 성서에 17번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해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인간 경험의 한계, 지식의 한계라고 본다면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거나 아버지와 아드님에게서 발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게 인간의 한계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당신 아버지와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지만,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제자들에게만 가르쳤던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말씀하면 말씀하실수록 멘붕의 상태에 빠져버린 제자들을 보시면서 끝내는 이 모든 일을 오실 진리의 성령께 맡기시고 스스로 자제하신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당부하고 싶은 말들은 많은데, 오히려 제자들이 더욱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다음 성령께서 오신 후에야, 제자들은 왜 그때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성령의 기억을 통해서 다시 듣고 보게 됩니다. 이는 성령강림을 통해서 차츰 제자들의 마음이 열리어 진리를 알아듣게 되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 두셨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16,13) 하고 표현하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파견되신 것은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 곧 구원을 통해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인류를 성부께 이끌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곧 진리이십니다. 이를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성령께서 이를 이어받아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서 언급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16,8참조)에서 참되고 거룩한 천상의 진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 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진리인 성령은 예수께서 아버지께 들으신 것을, 원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처럼 오직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리이고 생명에 이르는 진리임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들으신 것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 또한 성령께 들은 것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목말라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참으로 진리를 살고 있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진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막상 진리를 만나면 주춤하고 주저합니다. 왜냐고요. ‘진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기에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요17,17) 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그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미묘한 색깔을 묵상해 봅시다. 진리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진리 안으로’ 이끌림을 받아야 하고, 그 진리 안에서 차츰 진리가 아닌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나오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충만할 때까지 그분들의 사랑 안에 머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이미 그분 안에서, 진리인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17,28)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참으로 많으셨지만, ‘말을 삼키셨습니다.’ 이를 통해 느낀 점은 사랑은 기다림이며 여백이라는 점입니다. 예전 저희 엄마 역시도 할 말이 많으셨겠지만, 저희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은 ‘때가 되어 스스로 겪을 때’에야 비로소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았나를 배울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살아 온 세월만큼 삶의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고, 비워진 여백은 인생의 깨달음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때 ‘울 엄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관계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늘 진리’, ‘하느님의 신비’,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진리는 그러기에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을 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실 진리의 성령은 그러기에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16,13) 이 진리의 성령은 우리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하실 말씀과 하지 못한 말씀을 깨우쳐 주시기에, 우리는 ‘왜’라고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리라 믿습니다.

예전 저는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에 갔었죠. 그땐 바오로의 설교가 교회사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사실 잘 몰랐습니다. 그냥 ‘여기가 그 자리구나.’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긴 호흡에서 보면 바오로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현대에 와서 타 종교와 타 문화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설교이고 대화의 시도입니다. 유사성에서 출발하여 상이성으로 대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 (1코15,2~3참조)를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대화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이해할 수 없었고,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사18,1)

기도를 대신해서 조병화의  「어머니, 당신은 지금」을 보냅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눈으론  보이지 않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생각 속에 계시옵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귀론 들리지 않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햐얀 제 혼자 속에 계시옵니다  얘, 순리대로 사는 거다  매사 탁 풀고 사는 거다  마음 상할 거 없다  아파할 거 없다  당하는 대로 사는 거다  늦추며 늦추며 자연대로 사는 거다  아리게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순리대로 사는 거다   잠간이다, 하시며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으론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햐얀 제 눈물 속에 계시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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