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다시 조금 더 있으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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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5-09 | 조회수19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1)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장-16장의 말씀은 ‘최후의 만찬’ 뒤에 하신 말씀이고, 체포당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군인들이 이미 출발해서 겟세마니를 향해서 가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이고,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짧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체포되어서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재판을 받았고,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 시간은 실제로는 만 이틀이 안 됩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을 것이고, 부활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을 복음서 저자가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아마도 ‘수난 시간의 짧음’과 ‘부활 후의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몹시 슬퍼하면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하거나 좋아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뒤에, 자기들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고민거리가 마침내 제거되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라는 자가 스스로 예고한 대로, 정말로 부활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는 못했습니다(마태 27,62-66).>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묵시 11,10).”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땅의 주민들’과, 당신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모두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악인들’을 뜻하고,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들이 ‘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냅니다.>
3)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너희가 슬퍼하겠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겠지만, 그 슬픔은 부활의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뜻이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믿음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뒤에 ‘세상의 기쁨’은 무엇인가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습니다. 굳이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실제 상황을 보면,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마태 28,4.11-14). 그 두려움이 좋은 쪽으로 작용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고(사도 2,41), 끝끝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안 믿은 자들도 있었습니다(사도 4,2).>
4)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우리 인생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생과 지상에서의 인생을 비교하면, 우리 인생은 글자 그대로 ‘찰나’일 뿐입니다. <‘영원’과 ‘찰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지금의 고난과 시련은 금방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귀영화도 역시 금방 지나가는 것이고, 덧없고 허무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이고, 알면서도 외면하고, 지금의 인생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출처]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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