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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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5-21 | 조회수238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24년 05월 22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일이 제자들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금지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하는 일은 사실 빈번히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당함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자 제안된 것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야말로 하루빨리 배제하고 소외하여야 할 절대 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 또한 고착된 이념이나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허세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고자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교회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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