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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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5-27 | 조회수23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말 가운데에 있는 ‘버리고’ 라는
말은, “버려두다. 그대로 놓아둔 채 떠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사도들의 ‘마음’이
‘세속의 일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은, 세속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또 세속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따라나섰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 완전한 이탈과 자유’를 나타냅니다.>
필리피서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그 ‘버림’과 ‘비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허무한 것’을
모두 버리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ㄴ-38).”
이 말씀에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3)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버림’ 자체보다 ‘버리는 이유와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버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맹목적인 무소유는,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과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세상의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4) 30절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을
붙여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세에서는 모든 것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백배’ 라는 말은, 풍성함,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31절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처럼 처지가 바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그처럼 이쪽 세상에서 돈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심판,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나라의 밖에서’ 그 나라의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6,24-25).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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