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 (11,28)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하는 것이오?”(11,28)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던진 그들처럼 오늘을 깨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결은 다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 권위가 도전받고 참 권위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느끼게 되어 복종하게 되는데, 이같이 어떤 지시가 복종 될 가능성을 지배dominat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의 핵심적인 원천이 권한(권위) authority인데, 이러한 권한은 보편적인 가치 체계를 지닌 그것의 사용을 합법적으로 허락할 때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전통적 권한 Traditional Authority (=영원한 어제의 권위)으로, 현재의 사회질서가 신성하고, 그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는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지위, 계급, 전통, 관습이나 문화적 유산에서 비롯합니다. 둘째, 법적, 합리적 권한 Legal-Rational authority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법, 제도, 계약 등 공시적 규범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법률이나 규정에 따라 권한이 부여되며, 선거 등으로 뽑힌 사람이나 조직의 공식적 직위를 부여받은 책임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카리스마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비범하고 개인적인 은총)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개인의 비범하고 초인적인 힘이나 영웅적인 힘에 대한 애착에 기초한 권한으로, 여기서 카리스마는 기적을 행하거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하늘이 내려 주신 재능’이라고 정의합니다. 막스 베버는 권한(권위) 이론에서 전통적, 법적 합리적 권한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 그리고 감성 등을 억제하는 주 원천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항하는 다른 형태의 권한으로 카리스마적 권한을 제시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한은 당대 사람들에게나 현대인에게 베버가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깨닫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 보이는 기미를 전조前兆 현상이라고 표현하듯이, 유다 지도자들과 권한 논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오늘의 전조였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권한과 권위에 위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블랙리스트의 제거 1순위에 오른 분이셨잖아요. 그런 그분이 자신들의 텃밭에서, 나오바리(=마당)에서 난데없이 공개적으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시고, 너희는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1,15.17참조) 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곧 율법에 근거해서 합법적으로 ‘성전세’를 포함해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던 그들에게는 성전에 관한 확고한 기득권과 권위에 심각한 도전과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다, 는 표현처럼 그들은 선제공격의 차원에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11,28)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한 밑바닥에는 상실한 권위에 대한 자기방어 차원과 함께, 예수님의 권위를 묵살하려는 의도에서 어떻게라도 예수님의 답변에서 시비와 꼬투리를 잡으려는데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악한 질문 의도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선문답하시듯, 그들의 허를 찌르듯,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11,30) 라고, 오히려 대답을 대신해서 난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참으로 장군에 멍군으로 응수한 절묘한 한 수, 기발한 묘수이지 않나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 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고도 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 즉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자신들의 믿음이나 신념, 진리보다는 대중의 시선 곧 백성의 민심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11,33) 그들의 대답에 대응하여 예수님 또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11,33) 하고 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누누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5,17,19)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음이 닫히고 굽은 이들에게 牛耳讀經(=쇠귀에 경 읽기)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태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