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연중 제9주간 수요일 강론>(2024. 6. 5. 수)(마르 12,18-27)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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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04 | 조회수19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1) ‘부활 신앙’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두가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섬기는 이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에게 그런 권능이 없다면, 즉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런 신을 믿고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섬겼던 하느님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도 살아 있으면서 섬기는
하느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하신 것입니다.>
2)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1코린 15,32).
미래가 없으면 희망도 없고, 누구든지 희망이 없으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생존본능대로만 살게 되거나, 쾌락만 찾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내세도 없고, 하느님의 심판도 없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쓸 이유가 없게 됩니다.
또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도, 선을 지향하면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의 복음도 교리도 신앙도
다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5,12-15).”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향해서 “부활이 없는데도
있다고 믿는 바보들이다.” 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부활이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바보들입니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는 ‘그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삶’은 ‘현세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들, 욕망들, 갈등들, 다툼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오직 사랑과 평화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있다면, 이쪽 세상에서 이혼하거나
사별한 다음에 재혼하고, 또는 만났다 헤어지고, 그런 일들
때문에 부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황이 많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마르 12,19-23), 부활 후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누구나 다 금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해서, 또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서, 가정이 해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가족의 사랑과 일치가 더 깊어지고 완성될 것입니다.>
4) 루카복음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루카 20,35).
부활을 ‘아무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만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은총을 청하지 않고,
또는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9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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