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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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6-15 | 조회수18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마태 5,33-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요즘 세상입니다.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까지 증거가 만천하에 드러난 일을 안했다고 우기고, 자기가 예전에 했던 말들을 뒤엎는 일을 밥 먹듯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마음이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비단 거짓말만 문제가 되는게 아니지요.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나 나중에 ‘본의 아니게’ 거짓이 되어버리는 일, 즉 ‘맹세’도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맹세를 하는 것은 자신이 나중에 그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진실 앞에 늘 깨어있지 않으면, 중요한 일을 지금 즉시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입으로 내뱉은 그 맹세는 점점 나중으로 밀리다가, 나중엔 이런 저런 핑계 뒤에 숨어 허무하게 사라지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 즉시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맹세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함을 주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말씀에서도 함부로 이런 헛된 맹세를 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이 두 명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그는 자기 생일 잔치를 축하하는 춤을 춘 의붓 딸에게 ‘자기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헛된 맹세를 하지요. 그러나 그 맹세를 내뱉은지 얼마 후 죽게 됩니다. 또한 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 왕국은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이니 그 맹세는 처음부터 지킬 수 없었던 거짓 약속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대사제의 저택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자 자신을 그분을 모른다며 맹세를 합니다. 죽는게 두려워서 감히 하느님으로 하여금 ‘자신과 예수님은 아무 관계 없다’는 거짓을 보증하시게 만든 겁니다. 대죄도 그런 대죄가 없지요.
이렇듯 맹세는 사람이 자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보다 크고 강한 존재의 명성과 힘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맹세한 바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자기 신용과 체면이 깎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함부로 내세우고 이용한 신적 존재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절대 하느님을 두고 맹세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누군가를 해치려는 나쁜 의도로 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일 때, 즉 ‘하얀 거짓말’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한낱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교만이자, 감히 그분의 자리를 빼앗으려 드는 불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를 해서라도 자기를 드러내려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따르는 그 단순한 소명에만 전념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은 ‘예’하고 실천하고, 그분 뜻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요’하고 단호하게 배격하라고 하십니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사람 일은 어찌될 지 모릅’니다. 또한 ‘보증은 함부로 서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될 지 알 수도 없고 자기 뜻대로 바꿀 수도 없는 미래의 일을 함부로 보증하려 들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에만 온전히 집중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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