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때가 올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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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4-06-21 | 조회수18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때가 올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주의 지배자이시고 하느님만이 내가 죽을 때를 아시며, 하느님만이 중국을 회개시키실 수 있으십니다. 왜 그분이 우리가 지지 않는 책임을 지셔야 하며 왜 그분이 이슬람교가 아직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해서 또 불교가 수백만의 형제들의 내면에 불안과 위기감을 조성하지 않으면서 뿌리를 내고 있다고 해서 놀라셔야 합니까? 그러나 그때는 내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과연 시간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거룩한 역사인 하느님의 지라학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위격에 대한 희망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멸당해야 했거나 잊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계획들은 중요하지 않거나 적어도 하느님의 계획들과 일치를 이루는 한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선하는 쪽은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닙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강생의 때가 이르도록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마리아님 자신도 그리스도를 보시지 못한체 기다림 속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분이 오셔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 갈리래아 사람들은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며 가파르나움의 회당에 다녔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 배워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이 기다림은 결코 작은 노력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침묵 가운데 이루는 기다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행위입니다. 마침내 '부르심의 때', 마을 해야 하는 때, 결실의 때가 올 것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놀라운 일은 하느님께서 이렇듯 비참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를 도구로 이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춤 중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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