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의연히 주님 곁에만 머문다면 / 연중 제12주일 나해(마르 4,35-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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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22 | 조회수13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의연히 주님 곁에만 머문다면 / 연중 제12주일 나해(마르 4,35-41) 수출하는 횟감에는 ‘광어’가 한몫을 한다나. 그런데 물통에 넣어 먼 곳까지 가면 꼭 죽어 있는 놈이 생긴단다. 살아 있어도 멀미 탓에 빌빌거리는 놈도 쾌나 될게다. 그래서 천적인 뱀장어를 함께 넣어 봤다. 그랬더니 죽은 놈도, 빌빌거리는 놈도 없었단다. 먹성 좋은 뱀장어가 광어를 잡아먹으려 들자 도망치기 바빴던 것이다. 이러니 거센 파도도 광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뱀장어는 광어 몇 마리는 죽였겠지만, 대부분은 싱싱한 채 밥상에 올랐으리라. 인생에도 천적이 있다. 예기치 못한 만남, 상상도 못 했던 게 천적으로 등장하기도. 이는 그저 평범한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걸게다. 그래서 돌출로 시련이 있는 게 어쩜 정상적인 삶이리라. 그러니 천적은 어쩜 선물인 셈이다. 예수님은 천적 같은 호수의 그 바람에도 마냥 주무셨다. 거센 돌풍마저 잠재우시는 그분에게는, 호수의 바람은 아무것도 아닐 게다. 그러나 예사 바람이 아니기에, 출신이 어부라면 직감으로 위험의 낌새를 안다. 스승님께서는 주무시기만 하고 이대로라면 뒤집어질 게 분명하기에 순간 그들은 외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잠잠해져라.”하시니 주위가 고요해졌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에게는 빠지면 다 죽는다는 오로지 그 생각뿐인지라, 단지 인간적 계산만 했던 거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그 포기가 그렇게 힘드냐며 질책이다. 알고 보면 제자들도 보통이 아니다. 그들은 하늘의 힘을 보았고 기적의 그 자리에 동참도 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만 공포에 질렸다. 주님의 현존을 놓쳐 버린 때가 바로 두려움과 고독이 엄습하는 때이다. 그분을 잊어버릴 때 영혼은 불안한 가운데 공허감에 빠진다. 허나 제자들은 곧바로 주님을 찾을 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스승님, 저희가 모두 다 죽게 되었는데도 잠이 오시기나 합니까?” 우리 인생의 기반을 이루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이 믿음이다. 우리 삶에도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칠 때가 곧잘 있다. 그러나 믿음의 그 기반이 다시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중심을 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게다. 예수님께서는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배 안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 세상의 폭풍우가 두려운 게 아닌, 당신과 함께 있어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이 더 문제라는 것을 천적 돌풍으로 가르치시고자. 그리고 결국 우리 인생의 폭풍우를 잠재울 운명의 주재자는 세상의 그 무엇도 될 수가 없고, 오로지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고자 말이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세상에서 수없이 만나는 풍파들 앞에 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질책에 주님께 용서를 빌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있는 이가, 바로 참된 신앙인임을 잊지를 말자. 살다보면 심각한 두려움과 공포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이겨 낼 게다. 그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삶의 종착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일수도.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심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셨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를 잠재울 운명의 주재자는 세상의 그 무엇이 될 수가 없고, 오로지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인이다. 삶의 거대한 풍랑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여도 의연하게 주님 곁에만 머무를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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