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7.3)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 24 - 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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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7-02 | 조회수7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미학 교재로 자주 사용되는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은 어쩌면 ‘단순히 보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와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에게는 본다는 것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나의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대상이나 존재와의 관계 맺음이고, 이차적이며 본질적인 것은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 곧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으로 나가는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토마스 사도의 보고 싶다, 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처를 넘어서, 그 상처 이면의 의미를 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관계 맺음을 위한 마음의 표현과 표출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오늘은 열두 제자 중 한 분이신 토마스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녀가셨던 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으므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한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25)라고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이 표현은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겠다는 표현이라기보다 더 믿고 싶고, 더 굳게 믿기 바라는 강한 원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토마스의 의문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제기해 온, ‘예수께서 정말로 죽은 이들 가운데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는가?’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바탕이며 토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13~14) 라고 말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어떤 사람인지는 요한복음에 2번 등장합니다. 토마스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11,16)라고 할 만큼 용기 있게 맞서는 현실주의자로 나옵니다. 또한 그는 의문이 생기면 꼬치꼬치 캐묻는 학구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세상을 떠나실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사의 자리에서도,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14,5)라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질문 덕분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라는 대답을 예수님에게 듣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을 기억하고 있던 토마스 사도이었기에 지극히 단순하게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라고 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만큼 진리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의 의문에 응답하시듯 다시 나타나시어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0,27) 그러자 토마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자기 손을 대보거나 넣어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얄팍한 몸짓은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모독이며 믿음의 걸림돌이 될 뿐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상처가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의 흔적임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부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의 진리 앞에 그의 의심은 오히려 부활의 진리를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의심은 의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온전히 믿기 위한 디딤돌, 도약판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라고 말씀하신 것은 토마스에 대한 질책보다 미구에 당신을 보지 못하고 믿을 모든 사람에 대한 주님의 축복입니다. 이로써 토마스 사도의 의문은 부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모든 사람에게 향한 좋은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아울러 토마스의 고백은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이 주님께 고백해야 할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신앙의 자세는 바로 토마스처럼 진리를 향한 갈망과 회의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다음에는 기꺼이 인정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 또한 지금 품고 있는 신앙의 의문과 회의 앞에 처절하게 싸우고 그 진리를 온몸으로 터득한 다음에는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합시다.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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