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성 토마스 사도 축일(요한 20,2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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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7-02 | 조회수10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7/3) : 연중 13 주간 수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제1독서 : 에페 2,19-22 * 복음 : 요한 20, 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오늘의 강론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비록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져 더 큰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보게 된 것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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