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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토마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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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03 조회수108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셨음에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는 생생한 체험을 하지 못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삶에 변화를 이루어본 경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에 머물러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주변 사람들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해주면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본 게 아니니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이 기쁨과 놀라움에 겨워 상기된 모습을 보면서, 본인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혹시 자기만 그럴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못난 사람’이라 그런건 아닐까 생각하며 깊은 슬픔과 자괴감에 빠졌던 겁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더욱 간절히 만나고 싶었고, 그 만남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자신도 그분께 사랑받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토마스가 자신은 주님의 부활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표현한 것은 그런 슬픔과 자괴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에서 나온게 아니라,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그 귀한 자리에 자기만 빠졌다는 아쉬움과 서운함에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그분을 지켜드리지는 못할망정 자기 혼자 살겠다고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던 스스로의 비겁함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 함께 있어드리지 못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나약함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빌어주신 주님과 눈을 맞추고 화해하여 다시금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토마스만 차별하시는게 아니라면,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게 아니라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왜 하필 그가 없는 그 때에 제자들을 찾아 가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단지 토마스가 ‘운’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토마스를 위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게 될 우리 모두를 위해 준비하신 특별한 계획인 겁니다. 토마스는 자신을 몸소 찾아오시어 당신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자신을 향한 그분의 깊고 특별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이야말로 자신을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살리시는 진정한 ‘주님’이라는 굳은 믿음을 지니게 되었지요. 제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 한 번 나타나신 걸로 끝났다면, 토마스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 믿게 되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을 향한 그분의 특별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분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받아들이며 고백하는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토마스만 없는 자리에 나타나신 것은 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한 특별한 배려인 셈이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불신의 대명사’로 여기지만, 그는 최소한 보고 난 뒤에는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지요? 주님 현존과 사랑의 표징들을 삶의 주요 대목에서, 주변 곳곳에서 보고 또 보면서도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매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하면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꾸만 의심하지는 않는지요? 그럴 때 오늘 복음 속 토마스의 모습을, 그를 향한 예수님의 특별한 배려와 사랑을 떠올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인 ‘상처’를 직접 보고 그분 사랑을 믿은 토마스가 있기에, 우리는 굳이 주님을 직접 뵙지 않아도 그 상처를 직접 헤집어 보지 않아도 주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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